[책과 길] 표지석이라도 있어야 기억할텐데…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입력 2010-01-14 20:36


이순우/하늘재/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전인 1910년 8월 22일. 서울 남산 기슭에 있던 조선통감 관저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통감과 이완용 총리대신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공식적으로 넘어간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다. 통감관저는 조약체결 이후 총독관저로 바뀌었고, 39년 9월 현 청와대 자리에 총독관저가 신축돼 옮겨가기 전까지 29년간 그 기능을 유지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지만 이 곳에는 그 흔한 표지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치욕이라고 이렇게 외면해도 되는 걸까. 우리 근대사에 관한 기록들을 집요하게 파헤쳐온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소장이 펴낸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은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을 잊지 말자는 외침이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 이후 역사의 치부로 남겨진 장소와 건물, 사건, 사실들을 하나 하나 찾아 나선다. 치욕적인 사실일수록 오히려 더 또렷이 기억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통감관저는 서울시 소방방재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다목적 광장’이란 공터에 있었다. 저자는 ‘일본지조선’(1911 발간)에 수록된 사진에서 관저 진입로에 있던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와 진입로 형태를 보고 통감관저가 있던 위치를 찾아냈다. 통감관저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관저로 바뀌었고 이후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시정기념관’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에는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연합참모본부 등으로 쓰이다 헐렸다. 하지만 현재 이 곳에는 식민통치자들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저자는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고 들춰내는 일이 그리 달가울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이었으며 이 땅을 지배했던 역대 통감과 총독의 소굴이었다는 사실을 담은 표지석 하나 정도는 마땅히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라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저자는 통감관저 인근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에 1926년까지 자리했던 조선총독부에 얽힌 사연들도 들려준다. 또 서울 인왕산 정상 동쪽 ‘병풍바위’에 있는 커다란 글씨 흔적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1939년 경성에서 개최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란 친필을 이 곳에 새겼었다. 해방후에 글씨는 깎여 지워졌지만 흔적이 남아 치욕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저자는 또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세운 22개의 다리가 우리 재래의 고유명칭을 따르거나 새로 지은 것들이지만 청계3가 구간에 걸쳐 있는 ‘관수교(觀水橋)’는 일제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름이라며 이의를 제기한다. 관수교는 한일병합 이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순종이 기거하던 창덕궁과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 관저 간 이동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1918년 개설한 다리였다. 당시 순종은 이 다리를 거쳐 총독 관저에서 열린 일본의 국경일 경축행사나 일본천황 죽음을 조문하는 행사 등에 참석했다. 나라 잃은 설움과 치욕이 서린 다리인 셈이다. 저자는 “새로운 청계천을 만들면서 원래 관수교가 있던 자리에 다리를 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도 그 이름만은 되살리지 말았어야 옳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서울 인사동에 있었던 요릿집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3·1독립선언식을 거행하게 된 사연, 그리고 이 곳이 한일병합 후 한 때 친일귀족 이완용의 집이었다는 사실 등도 들려준다.

저자는 국회의원의 봉급을 세비(歲費)라고 부르게 된 이유, 80년전 열린 국내 첫 ‘우량아선발대회’, 당구 치며 소일했던 망국의 황제 고종과 순종 등 식민지 시대의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도 몇 가지 풀어놓는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해묵은 기억과 기록들을 간추려보고, 이를 되새기고, 다시 짚어야 할 것은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이라는 저자는 “이 책이 벌써 잊혀졌거나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에 대해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