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반성없는 사법부-인권에 눈감은 法 (상)] 잘못된 판결은 내 탓보다 세상 탓으로 돌려

입력 2010-01-13 22:02


고문 탓에 간첩 등의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거나 복역한 피고인들에 대한 재심에서 잇따라 무죄가 선고돼 원심을 맡았던 과거 재판부의 직무유기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1960∼80년대 간첩조작 등 시국 관련 사건 피해자들은 고문을 당했다고 법정에서 호소했지만 당시 재판부는 진실을 외면하고 유죄를 선고했다. 재심 끝에 무죄가 선고됐어도 선배 법관들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재판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판결문 통한 사과는 2건에 불과=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가 재심을 권고해 2009년 말까지 무죄가 확정된 사건 17건은 모두 당시 피고인들의 간첩 및 반국가단체 결성 등 혐의가 조작된 것으로 재심 과정에서 밝혀졌다. 중앙정보부(또는 국가안전기획부), 경찰 등 수사기관의 모진 고문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시 원심 재판부는 엄혹했던 정치상황 속에서 법률과 양심에 따라 증거 조사를 해야 하는 법관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아람회, 오송회 사건을 제외하고는 판결문을 통해 사법 피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한 재심 재판부는 없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건을 비롯해 석달윤, 차풍길 간첩조작 의혹 사건에서 재심 재판부는 고문 때문에 피해자들 진술에 증거능력이 없다는 점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조용수 사건 재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다시 심판한다는 의미는 재심 대상 판결의 옳고 그름을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처음부터 새로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혀 과거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다른 재심 사건을 맡았던 한 부장판사는 “진실위가 국가의 사과를 권고했어도 재판부가 꼭 사과해야 한다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과거 잘못은 인정, 사과는 인색=이수근 간첩조작 사건 재심 재판부는 “증거재판주의의 대원칙을 구현하지 못했고 무고한 시민에게 정의롭지 못한 형벌이 부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며 과거 재판부의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당하거나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를 담지는 않았다. 김양기 간첩조작 사건, 김기삼 간첩조작 사건의 재심을 맡은 재판부도 각각 당시 원심 재판부가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고 인정했으나 사과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피해자들, 판결문에 사과 남겨 달라=판결문에 사과를 담는 것은 법정에서 법관이 구두로 유감을 표명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법원의 공식 기록인 판결문은 영구보존 대상이다. 따라서 판결문에 사과가 담긴다면 후손들이 언제든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있게 돼 실질적인 명예 회복의 증거가 될 수 있다. 피해자 또는 유족들이 판결문 속 사과를 중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수십년간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피해자와 유족들은 재심 법정에서 무죄 선고가 나면 감격에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아 재판부가 말로 유감을 표명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한 피해자 가족은 13일 “판결문에 글로 사과를 남겼다면 억울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풀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정수 양진영 기자 j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