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상온] ‘아들 만세’의 終焉

입력 2010-01-13 18:10


“남아 선호 퇴조는 조선조 이래 최대 사변이라 해도 저출산 위기는 어쩔 건가”

돌아가신 내 할머니는 생전에 요샛말로 ‘미드’ 두 편을 즐겨 보시곤 했다. ‘보난자’와 ‘월튼네 사람들’. 나이 지긋한 층이라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TV 외화들이다.

보난자는 아버지와 세 아들, 4부자가 네바다주의 목장을 무대로 펼치는 시원한 서부극이고, 월튼네 사람들은 1930년대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올망졸망한 7남매(아니 8남매던가?) 등 3대가 버지니아주의 산골마을에서 힘들지만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홈드라마다. 둘 다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인기를 끈 장수프로였다.

살아남아 장성한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뿐이고, 그 아들도 겨우 아들 하나 딸 하나만 두었으니 할머니가 왜 이 미국 드라마들을 즐겨 보셨는지, 보시면서 얼마나 부러워했을지 짐작이 간다. 특히 보난자를 볼 때마다 할머니가 중얼거리시던 말은 지금도 내 머리에 남아있다. “저렇게 범 같은 아들이 셋이나 있으니 저 집은 얼마나 좋을꼬.”

유독 자식복이 없었던 내 할머니만 그랬으랴. 당시 노인들이라면 누구든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자손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고 아들이 많으면 더욱 좋고. 하긴 그때만 해도 적어도 아들 욕심은 노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젊은 부부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들을 낳으면 ‘스트라이크’, 딸을 낳으면 ‘볼’이라고들 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것도 하릴없는 과거사가 돼버렸다. 요즘 젊은 부모는 아들보다 딸을 더 바란다는 육아정책연구소의 조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젊은 어머니보다 아버지들의 딸 선호도가 더 높았다는 점. 어쩌면 아버지들이 스스로를 돌이켜봐도 ‘아들은 별로’라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드러낸 게 아닌가 싶어 고소(苦笑)를 짓게 한다.

어쨌거나 신문들은 이 소식을 크게 다루면서 남아선호가 끝났다느니 아들 선호도 옛말이라느니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비슷한 조사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예컨대 국정홍보처가 실시한 ‘2006 한국인 의식·가치관 조사’. 이에 따르면 30대 부부들은 자녀가 한 명일 경우 어느 쪽을 낳고 싶으냐는 질문에 21%대 17.3%로 딸을 더 선호했다(가장 많은 응답은 61.7%를 기록한 ‘상관없다’였다).

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6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실태조사’ 결과도 그렇다. 보사연이 15∼44세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물어본 결과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는 응답이 10.1%였던데 반해 ‘없어도 무관하다’는 49.8%였다. 1991년만 해도 전자와 후자가 각각 40.5%, 28%였던 것이 불과 15년 만에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육아정책연구소의 조사결과는 남아 선호에서 여아 선호로 사회풍조가 바뀌는, 또는 남아 선호가 무너져가는 추세를 처음 보여준 게 아니라 확인해준 셈이다.

그렇다고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다소 과장하자면 ‘조선조 이래 최대 사변급(級)’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가문의 대 잇기, 조상에 대한 제사와 그 연장선상에서 부모에 대한 아들의 봉양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조 500년, 그리고 이후 100년간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된 집단무의식이 스러지고 있다는 얘기이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이렇게 바뀌게 된 데는 의당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활발한 여성들의 사회·경제활동, 호주제 폐지, 종손의식의 퇴조와 노후의 삶에 대한 태도 변화, 그리고 아들에 대한 기대보다 부부생활에 더 중점을 두는 서양식 사고방식의 확산 등이 거기에 해당되겠거니와 이런 것들로부터 비롯된 남아 선호 퇴조라는 흐름은 이제 역류 불가능이라고 봐도 좋다. ‘딸이 없는 나라’(독일 주간지 디 자이트)라는 등의 비아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은 남는다. 남아 선호가 우리나라의 다산(多産)을 이끌어온 동력 중 하나임은 주지의 사실이고 보면 저출산 위기가 더 심화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글쎄, 쓸데없는 걱정일까.

김상온 카피리더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