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탄생 100주년…굿모닝! 李箱-(중) 멜론을 먹고싶소] 임종 직전 찾은 멜론… 끝내 넘기지 못한 달콤한 맛
입력 2010-01-13 22:37
1937년 2월 12일, 이상의 운명을 가름하는 순간이 왔다. 사흘 내내 방 안에만 박혀 있던 그는 울혈증 때문에 바람이나 쐬려고 산책을 나왔다. 하숙집 주인 이시카와는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요. 경찰관들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으니. 쯧쯧 난세야”라고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세수도 하지 않은 봉두난발의 이상은 무심하게 집을 나섰다.
그는 오뎅집에 들러 데운 정종 잔을 들었다. 술은 당분간 기침을 없애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곳에 갑자기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 형사 2명이 들이닥쳤다. 이상은 전신 수색을 받았다. “너 조선놈이지? 너 일본에 도망쳐 왔지? 경찰서에 가자!” 이상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는 니사간다 경찰서 감방에 수감됐다. 추운 겨울이었다.
지난달 말 찾아간 니시간다 경찰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간다 경찰서에 통합되고 그 자리에는 상업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간다 경찰서로 발길을 돌렸다. 경찰서 입구 게시판에는 지명수배자 얼굴이 찍힌 전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70여년 전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간 이상도 경찰서 앞에서 이 살벌한 풍경과 맞닥뜨렸을 것이다.
행정 담당 경찰관에게 “37년도 조선인에 대한 조사 기록을 볼 수 있느냐”고 했더니 “전쟁 이전의 기록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든, 어떤 이유에서든 기록을 보여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경찰서 내 유치장에는 네댓 명의 피의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한겨울 감방에서 폐결핵이 극도로 악화된 이상의 모습도 저랬을까.
이상은 3월 16일까지 34일간 불령선인(不逞鮮人) 즉 ‘명령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폐결핵이 심해지자 경찰은 그에게 보석을 허가했다. 보석금도 없이 행려사망자로 예측돼 풀려나온 것이다. 김소운 등 몇 명의 유학생들이 그를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시켰다. 한때 선망했던 동경제대를 이상은 죽음을 맞이하러 들어갔으니 비운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기자가 찾아간 도쿄대학 부속병원에서도 간다 경찰서와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70년도 지난 기록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없을 것이다. 있다손 치더라도 가족이든 누구든 절대 보여줄 수 없다.” ‘박제가 된 천재’ 이상 문학 종착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좀 더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한·일 양국의 이상 문학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져 모든 기록이 공개될 때까지.
이상이 입원했던 병동 역시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병원에 들어서니 당시의 상황이 활동필름처럼 스쳐 갔다. 이상의 입원 소식에 아내 변동림이 서울서 달려왔다. 아내가 도착하자 이상은 잠시 아는 체를 했으나 금세 쓰러져버렸다. 아내는 하얀 한복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남편의 귀에 대고 물었다. “무엇이 먹고 싶어?” 이상이 힘겹게 입술을 떼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센비키야(千疋屋)의 멜론.”
이상이 숨진 후 화가 김환기와 재혼하면서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꾼 부인 변동림(2004년 작고)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중)
레몬은 노란 빛깔이 아름답지만 자르지 않으면 향취는 없다. 반면 멜론은 깎지 않고 놔두기만 해도 향취가 진동한다. 자르면 향기로운 미각이 더해진다. 도쿄 센비키야 농원에서는 멜론을 재배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상은 마지막 순간 향기와 더불어 달콤한 맛을 찾은 것이다. 이상이 임종 직전에 레몬을 찾았다는 문학평론가 이어령 등의 주장에 대해서도 김향안은 “(그렇다고 해서) 그릇된 것은 없다. 평소에 이상은 레몬의 향기를 즐겼으니까”라고 담담하게 회고하고 있다.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이상은 마지막 호흡을 끝냈다. 폐결핵에 의한 사망이었다. 아내는 운명했다고 의사가 선언할 때까지 식어가는 손을 잡은 채 조용히 울고 있었고, 김소운도 안경 너머로 눈물을 흘렸다. 한국문학의 모더니티 콤플렉스를 온 몸으로 떠안은 천재 시인은 예술가의 광태를 유감없이 누리고 스물일곱 살 짧은 생애의 박제된 자화상과 영원히 이별했다.
서울 신당리 버티고개 집에서는 그가 죽기 하루 전 16일 낮에 아버지 김연창이 세상을 떠났다. 이어 조모가 같은 날 밤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변동림은 그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이상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도쿄로 떠났다. 경성에서 부산까지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관부연락선을 타고 또 시모노세키에서 도쿄까지 스물네 시간 기차를 타고.
미망인 변동림은 도쿄 근처 구단자카(九段坂) 화장장에서 남편의 사체를 화장했다. 남편이 갚아야 할 돈을 하숙집 주인 이시카와에게 갚은 다음 유품과 유골을 안고 다시 버티고개로 돌아왔으니 동경을 떠난 지 보름만의 일이다. 그의 친구들이 모인 가운데 같은 해 3월 29일 역시 폐결핵으로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치르고 유해는 6월 10일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이후 아내는 한 번도 성묘하지 않았다. 대신 많은 작가들이 마음 속 이상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나의 종생(終生)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어(終生語)는 끝나지 았았다.” 도쿄의 허름한 하숙집 골방에서 죽음을 예감하듯 쓴 ‘종생기’의 반어법이 아니더라도 이상 문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30년대를 풍미한 모더니스트, 그의 죽음은 이상 문학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도쿄=글·사진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