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신의 깜짝 한수] 원익배 십단전 결승 2국 ● 이창호 9단 ○ 박정환 5단

입력 2010-01-13 17:55


천지가 온통 하얗다. 앙상한 나뭇가지는 새하얀 솜옷을 입고 서로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똑딱똑딱 시계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던 고요한 새벽. 어디선가 눈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미끄러졌다. 아, 미끄러운 빙판길에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폭을 좁혀 걸으라고 했거늘 딴생각을 하다 넘어졌구나. 정신 바짝 차리자!

새해 들어 처음으로 벌어진 결승전 3번기. 원익배 십단전은 일주일 사이에 세 판을 소화해야 한다. 이창호 9단 대 박정환 5단의 대결. 세대교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처음 이창호가 스승을 상대로 첫 도전기를 벌일 때만큼 파격적이진 않지만 어째 느낌은 큰 산과 작은 산이 마주보고 앉아있는 것 같다.

몸이 덜 풀렸는지 맥없이 1국을 패한 박정환 5단. ‘작은 산이라고 산이 아닐소냐! 한 번 해보자!’며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눈빛에 총기를 가득 담고선 바둑판 앞에 다시 앉았다. 초반은 흑의 실리와 백의 두터움으로 갈렸다. 실리를 취하느라 엷어진 중앙을 잘 간수하는 것이 앞으로 흑이 할 일이라면 백은 그 돌들을 공격해서 최대의 효용을 보는 것이 승부라고 할 수 있겠다.

눈에 보이는 집만 보면 부족해 조급해질 법도 한데 백은 계속 두텁게, 하지만 균형을 잃지 않으며 꾸준히 노리고 있다. 그 진득함에 질렸는지 흑은 우변에서 실수를 범했다. 하지만 아직도 빈 곳은 많이 남아 끝이라고 말하기엔 어려운 장면. 여기서 작은 산은 칼을 뽑아 승부를 결정짓는다.

실전의 흑1로 붙인 장면. 이 때 잠시 판 전체를 둘러보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결심한 듯 두어진 백2! 참고도의 흑1로 이으면 백2로 안쪽으로 젖혀 백10까지 흑은 전멸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실전 흑3으로 귀를 포기하고 타협을 했지만 백10까지 귀가 통통하게 들어가게 돼서는 백의 승리가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 후 몇 번의 시비를 더 걸어보다 결국 흑은 돌을 거두었다. 바둑이 끝나고 수줍은 듯 활짝 웃으며 나오는 박 5단의 사진을 보니 어째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다음날 벌어진 3국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18세 소년 박정환 5단은 박정환 십단이 되었다. 아, 물론 실제 단위는 9단까지가 끝이고 십단은 타이틀 명칭이다. 하지만 적어도 일 년 동안은 박십단이라 불리게 생겼다.

이창호 9단이 십단일 땐 ‘이십단’이었는데….

세세평안 하소서.

<프로 4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