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순백의 설산’ 한폭 수묵화라… 태백으로 떠나는 겨울여행

입력 2010-01-13 17:34


매서운 겨울바람이 백두대간을 할퀸다. 태백산 주목과 매봉산 풍력발전기가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지른다. 차가운 별빛이 귀네미마을의 황량한 눈밭을 산책하고, 서늘한 달빛은 통리역 플랫폼에서 눈사람을 벗한다. 이윽고 황홀한 아침햇살이 산 넘고 물 건너 함백산을 오른다. 밤새 울부짖던 나목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처럼 순백의 상고대로 단장한 채 수묵화의 주인공이 된다.

‘설악산은 가산(佳山), 오대산은 명산(名山), 태백산은 영산(靈山)’이라는 말이 있다. 설악산보다 높지 않고 오대산보다 화려하지 않은 태백산에 왜 영산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태백산이 랜드마크인 강원 태백은 산의 중심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태백산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산의 중심인 태백은 물의 중심이기도 하다. 백두대간 삼수령에서 흘러내린 물이 북쪽으로 흐르면 한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그리고 동쪽으로 흐르면 오십천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산과 물의 중심인 겨울 태백의 제1경은 매봉산 설경. 삼수령에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3.8㎞ 오르면 눈 덮인 매봉산(1303m)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매봉산 정상은 바람이 드세 ‘바람의 언덕’으로 명명됐다. 부드러운 능선을 수놓은 8기의 풍력발전기가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고 설원으로 변한 산비탈에는 바람의 무늬가 기하학적으로 새겨져 있다.

천의봉으로도 불리는 매봉산은 고랭지 배추단지로도 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화전민들을 이주시켜 개간한 배추밭의 규모는 110만㎡. 트럭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은 농로는 가파른 등고선을 그리며 정상을 올라 ‘배추고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거대한 풍력발전기 아래에서 시계바늘처럼 쉬엄쉬엄 돌아가는 빨간색 풍차가 이곳에서는 장난감처럼 앙증맞다.

태백에는 매봉산에 버금가는 고랭지 배추단지가 하나 더 있다. 삼수령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한강발원지인 검룡소를 스쳐지나 삼척·강릉 방면으로 달리면 귀네미마을이 나온다. 소의 귀를 닮아 귀네미로 불리는 마을도 광활한 배추밭에 둘러싸여 있다. 해돋이가 멋스런 백두대간 능선에서 내려다보는 귀네미마을의 설경은 한 폭의 그림. 이따금 참새 떼가 시래기만 남은 배추밭에서 군무를 펼칠 뿐 사위는 고즈넉하다.

스쳐가기 십상이지만 삼수령에서 귀네미마을 가는 길에는 자작나무 숲도 있다. 자작나무는 추위에 강한 수종으로 시베리아 등 북반구에서 자라는 나무. 설원을 배경으로 눈보다 더 하얀 껍질을 자랑하는 자작나무 숲의 풍경이 이국적이다. 태양 위치에 따라 미묘한 색의 변화를 일으키는 자작나무의 붉은 가지도 이채롭다.

해발 700m에 위치한 태백은 한때 탄광의 도시였다. 태백의 탄광은 한때 44개였으나 석탄합리화 정책으로 현재는 한 곳만 남아 옛 탄광도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탄광의 흔적이 역력한 곳은 영동선과 태백선이 달리는 철도역 주변. 기차역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추전역(855m)을 비롯해 철암역, 통리역 등에는 철도를 따라 검은 석탄과 하얀 눈이 뒤섞여 묘한 흑백의 조화를 이룬다.

태백의 철도역 중에서 가장 운치 있는 역은 스위치백 구간으로 유명한 통리역. 이따금 눈꽃열차가 눈사람이 서있는 통리역 플랫폼을 빠른 속도로 스쳐갈 뿐 대합실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즈넉하다. 때마침 석탄을 싣고 위해 스위치백 구간을 힘겹게 올라온 화물열차가 통리역에서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다.

태백의 설경은 산의 중심인 태백산에서 절정을 이룬다. 태백산 눈축제를 앞두고 거대한 눈조각이 만들어지고 있는 당골광장에서 태백산을 오르면 눈꽃과 상고대가 활짝 핀 주목이 군락을 이룬 채 태백산 정상과 능선을 수놓는다. 이른 아침 주목 가지 사이로 솟은 해는 태백산을 대표하는 풍경.

오투리조트의 으뜸마루(1420m)에서 맞는 백두대간의 겨울풍경은 장쾌하다. 색색의 곤돌라를 타고 함백산 정상 아래에 위치한 으뜸마루에 오르면 태백산과 매봉산을 비롯해 태백시를 둘러싼 설산들이 가없이 펼쳐진다. 중중첩첩 능선을 포개며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가는 설산의 행렬이 마치 출전을 앞둔 장수처럼 엄숙하다.

태백의 겨울비경은 서학골 오투리조트 입구에서 대한체육회태백선수촌을 거쳐 함백산 삼거리까지 이어지는 3㎞ 길이의 도로에도 즐비하다. 해발 1000m를 넘나드는 이 길은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도로 아래로 웅혼한 기상의 설산이 수묵화로 변해 동해로 뻗어나간다. 이른 아침 수묵화를 그리는 능선 중간에서 동해를 향해 포효하는 형상의 사자바위는 이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

태백에서 가장 높은 함백산(1573m)과 우리나라 포장도로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만항재(1400m), 그리고 태백선수촌으로 갈라지는 함백산 삼거리는 태백의 설경 중 으뜸. 봄부터 가을까지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피고지는 삼거리는 해발 1300m 고지로 이곳에 쌓인 눈은 봄이 올 때까지 녹지 않는다. 눈꽃이나 상고대라도 피면 삼거리 일대는 환상의 눈꽃화원으로 변신한다. 눈꽃화원이 가장 화려한 때는 상고대가 핀 나목이 햇살에 오렌지 빛으로 젖을 때.

함백산 삼거리에서 만항재 삼거리까지 태백과 정선의 경계를 넘나드는 1.5㎞ 길이의 도로는 천상의 화원. 눈꽃터널로 변한 길 아래로 태백 정선 영월의 설산이 일망무제로 펼쳐지고 태양이 함백산을 향해 고도를 높일 때마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풍경화를 그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아늑하고 호젓한 그 길에 ‘태백눈꽃고도’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태백=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