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13) 해외 원단 분석해 한국 기술·취향에 접목

입력 2010-01-13 17:31


1980년부터 패션 의류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나는 본격적으로 해외에 나가 원단 샘플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에 앞서 1979년 다른 회사 사람들과 단체로 유럽을 돌아본 일이 있긴 했지만 혈혈단신 외국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믿었던 것은 겨우 ‘7개국 회화’라는 제목의 조악한 책 한 권이었다. 여권을 발급받는 것도 무척 어려웠다. 교회 분들의 도움으로 겨우 낸 것도 단수여권이라 한 번 나가면 런던 파리 밀라노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뉴욕까지 주요 도시를 다 돌고 와야 했다.

그때 내 전략은 이랬다. 일단 목적지인 도시 공항에 도착하면 택시를 탔다. 그리고 택시 기사가 가지고 있는 관광 안내 책자를 뒤져 태극기 표시를 찾았다. 그 장소는 거의 한국 대사관 아니면 한국 식당이었다.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한 뒤 거기서 도움을 받아 도시의 정보를 파악했다. 또는 도심 관광안내소로 찾아간 뒤 투어 버스를 타고 주요 관광지를 돌다 보면 ‘아, 저기가 패션 중심지구나’ 하는 감이 왔다.

그리고 바로 내려서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거기서 샘플이 될 의류들을 구입했다. 예산이 한정돼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했지만 예닐곱 도시를 돌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커다란 여행가방 3개가 꽉 차고도 넘칠 정도의 분량이 됐다.

이렇게 가져온 의류들은 바로 거래처인 의류회사, 방적회사와 함께 분석에 들어갔다.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의 생산 기술과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야 했다.

우리가 주로 만드는 원단은 봄·여름 시즌의 여성복용이었는데 제때 유행에 맞는 옷을 내놓으려면 우리는 적어도 1년반에서 2년 앞서 트렌드를 읽어야 했다. 이 분석이 잘 되면 상품이 잘 팔리고, 안 그러면 재고로 남는다. 그러나 적중률은 거의 70∼80%였다. 그래서 반도패션 코오롱 제일모직 등 까다로운 대기업들에 성공적으로 납품해 큰 마진을 남길 수 있었다. 또 좋은 점은 나머지 20∼30%의 재고도 품질은 좋았기 때문에 평화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 내놓으면 다 팔 수 있었다.

우리 회사는 직원이 많아야 십수 명이었지만 수백 개의 하청 공장에서는 우리 물건이 밤낮 없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아이디어와 자료, 납품할 거래처만 있으면 당시 관행이었던 선급금 없이도 공장과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1990년대 중반까지 열심히 해외 출장을 다녔다. 그러던 중 외국의 어느 거리를 헤매다 어떤 깨달음이 왔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운이 좋아 알음알음으로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하곤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은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패션 도시들을 다니다 보니 나에게는 새로운 것, 감각적인 것,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비록 돈 계산은 빠르지 않았지만 이런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청소년 시절 막연하게 법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어봤을 뿐 단 한번도 내가 미적 감각이 있다는 생각은 못 해봤고, 이런 산업이 있다는 것 자체도 몰랐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묻혀 있는 내 능력을 미리 보시고 적절히 쓰일 곳으로 나를 인도해 주신 것이다. 출장 에피소드 중에는 ‘나를 이렇게도 쓰시는구나’하고 신기해한 일이 한 가지 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