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열매] 박래창 (12) 보증섰던 회사 부도로 닥친 고난 앞선 기술로 타개

입력 2010-01-12 17:34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그 직후 사회 전반이 술렁였고 그 가운데 김교석 회장의 회사 중 두 개가 부도났다. 그 전까지 아무 문제 없던 회사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김 회장은 잠적했고 나도 주변에서 “빨리 있는 것 챙겨 도망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운영을 맡고 있던 메트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내가 지불보증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우리 회사로 채권자들이 몰려왔던 것이다.

당시 우리 같은 회사들은 은행 대출은 생각도 못 했고 거의 사채를 썼다. 연 36%의 고리지만 2∼3개월 현금을 당겨 쓰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넘기곤 했던 어음들이 한꺼번에 돌아와 내 목을 칼날처럼 겨누었다.

나로서도 갚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 2∼3일은 숨어 지냈다. 그래도 교회에는 나갔다. 그 직전에 소망교회 1기 장로로 피택되고, 고등부 부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얄궂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살려주겠다’는 사인을 보내놓은신 게 아닐까 생각됐다.



머릿속이 새카맣게 된 채로 새벽 예배에 나가 ‘내가 만일 도망간다면 신앙생활도 망가질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러자 ‘알거지가 될지언정 당당하게 나서자’는 결심이 섰다.

다음날 바로 사무실로 나갔다. 예상한 대로 채권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제가 가진 재고 상품과 외상 매출, 집까지 다 내놓겠습니다. 빚잔치하려면 하십시오. 그 이상은 드리려야 드릴 게 없습니다.”

이렇게 밝히자 채권자들이 수군수군하며 한참 상의를 했다. 그리고는 대표로 한 사람이 말했다.

“박 사장은 아직 가능성이 있으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어음을 순차적으로 돌릴 테니 장사해서 버는 대로 갚으십시오.”

이렇게 해서 일단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속으로는 ‘매일같이 돌아올 어음을 김 회장도 없이 나 혼자 막아나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뒤 컬러 TV가 보급되고 교복이 자율화됐다. 이 두 가지 사건이 나에게는 돌파구가 됐다.

갑자기 사회에 ‘패션’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면서 패션 의류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때 우리나라는 원단 수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의류 회사들은 좋으나 싫으나 국산 원단을 써야 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당시 패션 의류에 쓰일 원단을 만들 만한 곳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회사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너무 앞서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기치 못한 ‘때’를 만나자 창고에 쌓여 있던 원단들까지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후부터는 어음 막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얼마 안 돼 부채를 다 정리하고 다시 매출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즈음 교회에 건축헌금 드리는 날이 돌아왔다. 하루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1년 전 작정한 대로 500만원을 낼 수 있었다. 헌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쏟아졌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쓰시는구나.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잘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이구나.”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으로 출근했던 지난 1년을 반성하게 됐다.

이때부터 내 사업은 전환기를 맞았다. 패션을 제대로 선도하기 위해 해외로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정리=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