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탄생 100주년…굿모닝! 李箱-(상) 날자,한번만 더 날자꾸나] 암울한 지식인,도쿄 하숙집 쪽방서 理想을 꿈꾸다
입력 2010-01-12 18:14
얼마나 동경(憧憬)하던 동경(東京)이었던가. 1936년 11월 21일, 이상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드디어 도쿄에 도착했다. 한국 근대문학 모더니즘의 천재가 아니라 초라한 행색의 이방인이었다. 간다구(神田區) 진보초(神保町) 산초메(3丁目) 10의 1번지 이시카와(石川)씨네 하숙집 4호방에 짐을 풀었다. 그러나 이곳이 불과 5개월 만에 그의 생애 마지막 거처가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을까.
그로부터 73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달 말, 도쿄에서 이상 문학의 흔적을 찾는 일은 한·일 간에 드리워진 철옹성같은 시공간의 장벽을 허무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시인이 머물렀던 다다미방 하숙집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센슈대학 콘크리트 건물만이 삭막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다만 높게 솟은 빌딩이 이상(理想)을 좇아 이곳에 날아든 이상의 ‘날개’를 떠올리게 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에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그는 한 번만 더 날갯짓을 하기 위해 일본행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식민지 시대, 암울한 지식인의 역설적인 비상(飛翔)의 꿈! 이상은 경술국치와 함께 태어났다. 1910년 음력 8월 20일이었다. 고종 때 관직 도정(정3품 당상관)을 지낸 증조부 김학준은 아들 병복을 낳았고 병복은 두 아들 연필과 연창을 얻었다. 연창은 박세창과 결혼 후 이상을 낳았다.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난 이상은 3세부터 23세까지 통의동 큰아버지 연필의 집에서 자랐다. 아들을 얻지 못한 큰어머니의 시기와 이에 따른 가족 갈등은 그에게 소외의식과 고립적 성격을 낳게 했다. 식민지와 개화기라는 이질적인 환경에서 탈출하고픈 욕구는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어 전람회를 열 정도였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닿고 싶은 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36년 11월 17일, 이상은 아내 변동림과의 4개월에 불과한 신혼생활을 뒤로 하고 도쿄로 떠났다. 경부선에 몸을 실은 후 관부연락선으로 갈아 타고 현해탄을 건너 다시 기차로 내달린 문학적 천재의 긴 여정. 마지막 여행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 여정을 통해 그는 도쿄에서 부활하고 싶었다. 도쿄는 그의 문학, 모더니즘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문화적 허영뿐이었다.
센슈(專修)대학 정문 맞은 편, 이상이 거처했던 하숙집 앞 골목길에는 문을 연 지 60년쯤 지났다는 허름한 부동산 가게 외에는 옛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부동산 주인은 “센슈대학이 1882년에 개교한 뒤 전쟁(1945) 이전까지만 해도 하숙집이 줄지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500m쯤 가면 300여개의 헌책방 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상은 틈만 나면 고서점가를 돌며 일본문학을 접한다. 도쿄역까지 도보로 15분 가량 걸리는 진보초의 허름한 주택가에서 한상직 장서언 유연옥 등 경성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삼사문학 동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일본 작가들이 드나드는 술집과 다방 등도 둘러보았다. 세계적인 공황의 여파로 당시 일본의 경제생활에도 어둠이 덮여 있었다.
경찰은 예비 검속을 통해 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마르크스주의자, 자유주의자를 처단하고 특히 한국인들을 불온불령선인으로 검거하는 일이 잦았다. 제국의 질서를 강조하는 정권과 자유를 갈망하는 시민이 혼재하는 일본 사회의 모순에 이상은 실망하고 말았다. 그가 기대했던 일본 작가들은 만날 수 없었으며 무명 작가들을 만나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대부분 시간을 싸늘한 다다미 방에서 홀로 지내거나 가끔 도쿄대와 도쿄역 그리고 헌책방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걷는 것이 일본 생활의 전부였던 이상에겐 ‘조광’ ‘매일신보’ ‘중앙’ 등 한국 잡지와 신문을 읽는 일 외에는 행복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술에 취해 다다미방에 누우면 하숙집 딸이 갖다주는 고다스(이불 속에 넣는 화로)에 다리를 오그리고 잠이 들곤 했다.
나루노치 빌딩, 신주쿠 거리, 스키지 소극장, 여관이 즐비한 뒷골목, 요시하라 유곽촌 등 도쿄의 지리를 대충 익힌 이상은 글쓰기를 계속했다. 쓰다 중단한 ‘봉별기’를 완성해 서울로 보내고 ‘권태’ ‘공포의 기록’ ‘슬픈 이야기’ 등 고독과 싸우며 치열한 작업을 했다. 센슈대학 건물 유리창 너머에는 이곳 어디쯤엔가 있었을 이상의 하숙집 4호방의 풍경이 상상속 실루엣처럼 펼쳐보였다.
그러나 이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쿄를 혐오하게 되고 건강도 급속도로 악화됐다. 폐결핵의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신경쇠약과 불면증은 그를 타락의 늪으로 빠지게 했다. 그는 어떤 명분만 생기면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환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짧은 삶의 파국을 예고하듯 ‘종생기’(終生記)를 쓰고 있었다.
“25세 11개월을 맞은 홍안미소년인 나는 멋진 종생을 계획한다. 열세 벌의 유서가 거의 완성되어 가는 어느 날 정희에게서 속달이 왔다. 3월 3일 오후 2시 동소문 버스정류장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내가 눈을 다시 떴을 때 거기 정희는 없었다. S에게로 간 것이다. 이리하여 나의 종생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는 끝나지 않는다.”(‘종생기’ 가운데)
도쿄=글·사진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