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정주영과 가창오리

입력 2010-01-11 18:10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은 ‘동물의 왕국’ 비디오테이프를 즐겨 봤다고 한다.



그의 땀과 개척정신이 배어 있는 충남 태안의 현대서산농장에 들어서면 흰 페인트를 칠한 아담한 단층건물 한 채가 눈길을 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서산간척지 공사가 시작되던 1979년부터 2001년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이용하던 숙소로 이곳에는 평소 그가 사용하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지만 정 명예회장의 유품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닳고 닳은 운동화 한 켤레, 즐겨 입던 잿빛 두루마기 한 벌, 벼루와 붓, 아내인 고 변중석 여사가 사용했던 재봉틀 등등. 재벌 총수의 유품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런데 유품 중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동물의 왕국’ 비디오테이프이다.



정 명예회장은 생전에 왜 ‘동물의 왕국’을 즐겨 보았을까. 먹고 먹히는 치열한 기업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육강식의 동물세계에 호기심을 가졌는지, 아니면 바다를 메워 동물들이 뛰어노는 드넓은 초원을 만들고 싶었는지는 고인만이 알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정 명예회장은 유조선공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동원해 천수만에 엄청난 규모의 땅과 호수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땅에서 사자 대신 소를 사육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이곳에서 사육한 소 떼를 트럭에 싣고 방북해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바다가 호수로 변하고 간척지에서 쌀을 생산하면서 가창오리를 비롯해 60만 마리의 철새가 날아들어 천수만은 일약 세계적 철새 도래지로 명성을 날렸다. 추수가 끝난 후의 낙곡을 먹기 위해 멀리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가창오리와 기러기는 아침저녁으로 아름다운 군무를 선보여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정 명예회장이 즐겨보던 ‘동물의 왕국’이 건설된 셈이다.



그 천수만에 몇 해 전부터 가창오리를 비롯한 철새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유는 자금난을 겪던 현대건설이 A지구의 농지 대부분을 민간에 팔면서 철새 먹잇감이 줄었기 때문이다. 현대가 영농을 할 때는 낙곡이 10% 가까이 되었으나 민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1∼2%로 줄어들었다. 철새들은 먹이가 줄어들자 서서히 천수만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천수만을 찾더라도 잠시 머물 뿐 곧 군산이나 해남 등으로 월동지를 옮겨버린다. 최근에는 순천시가 철새를 보호하기 위해 전봇대를 뽑고 철새 먹이를 공급하면서 순천만이 제2의 천수만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 천수만에 태안관광레저도시 ‘라티에라’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라티에라의 위치는 간월호와 부남호로 이뤄진 간척지의 서쪽 443만평으로 9조원을 투입해 2020년까지 인구 1만5000명, 연간방문객 770만명의 친환경 명품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애초 이곳이 관광레저도시 부지로 선정된 이유는 천수만이 철새의 낙원으로 관광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시행사인 현대도시개발은 오염으로 인해 철새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든 부남호를 준설하고 습지를 조성함으로써 다시 철새들이 찾는 생태도시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관광객이 몰려들면 철새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구가 없다. 지난 연말에는 충남도가 부남호 일대에 열기구를 띄우고 요트 100척이 항해하는 마리나 단지를 건설하는가 하면 29㎞ 길이의 승마 길을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세계적 철새 도래지인 천수만 일대를 경쟁력 있는 국제관광휴양단지로 개발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모색한다는 취지다.



철새는 육상동물과 달리 주변 환경에 민감하다. 열기구가 둥둥 떠다니고 요트가 질주하는 천수만에 철새가 찾아올 리 만무하다. 이미 먹이가 줄어들고 환경이 오염되자 월동지를 옮겨버린 철새다. 충남도가 철새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열기구를 띄우는 어리석은 일을 안했으면 한다. 이는 철새를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쫓아내는 일이다.

박강섭 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