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변재운] 軍官民, 民官軍

입력 2010-01-11 18:13


“재정부 차관의 금통위 회의 참석을 압력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이 서글퍼”

전두환 정권 시절 짧은 기억 하나. 동사무소에서 일을 보는데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동 직원들의 눈길이 한곳으로 쏠리면서 긴장감이 감돈 것. 뒤를 돌아보니 육군 소위 한 명이 동사무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대기 번호표도 없던 시절, 보무당당한 소위는 직원의 친절한 안내로 먼저 온 사람보다 빨리 일을 보고 나갔다.



젊은 사람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과거 군부독재 시절 군인들의 사회적 지위와 위세는 대단했다. 당시는 군관민(軍官民)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썼다. 예를 들면 “군관민이 한마음으로 나서 수해복구를 도왔다” 등의 표현이다. 정부 부처 장관도 내무부나 체육부, 건설부, 교통부, 체신부, 국세청 등 전문성이 덜 필요한(?) 곳은 군 출신들이 많이 기용됐다. 사단장이나 군단장 등 거대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장점이라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 언제부턴가 ‘군관민’은 ‘민관군’으로 바뀌었다. 그리나 ‘민’은 아니었고 그 즈음부터 ‘관’의 세상이 도래했다. 특히 경제정책을 다루는 경제관료의 파워는 막강했다. 한번은 상공부 출입기자단이 담당국장의 안내로 수원의 모 기업체를 방문했는데 회사 정문 플래카드에는 ‘○○○ 국장님 방문 환영’이라고 써 있어 기자단이 머쓱했던 해프닝도 있었다.



관의 힘이 큰 것은 권한 때문이고, 권한은 규제에서 나온다. 당시는 규제공화국이라 할 만큼 규제가 많았고 기업체들은 관에 잘 보여야 사업이 원활하게 돌아갔으니 관을 상전 중에 상전으로 모셨다. 관에서도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정책을 다루는 재무관리들은 가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금융에서 관존민비(官尊民卑)가 두드러졌던 것은 금융이 갖는 중요성도 있지만 사기업과 달리 주인이 따로 없는 업체가 많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재무 관리들은 정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다. 그 같은 관리들의 ‘보호본능’이 지금 우리나라 금융인들의 경쟁력을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게 만든 측면이 있다. 자기책임 하에 일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강정원 KB금융 회장대행을 둘러싼 논란도 좋게 표현하면 관리들의 지나친 ‘보호본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기로서니 별 능력도 없는 민간인이 그 중요한 금융을 장악하고, 나가라 해도 말을 안 듣고 대드니까 화가 나는 것이다.



며칠 전 한 신문에서 읽은 정부 관계자의 멘트는 충격적이다. 다른 신문이 익명으로 쓴 기사를 인용하는 게 적절하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문답이어서 맞을 거라 보고 인용하면 이렇다. 강 회장 사퇴압력과 관련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기자가 질문하자 정부 고위 관계자는 “금융은 너무 중요하다. 민영화됐다고 자기 왕국까지 허용된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여론이 나쁘다고 지적하자 “그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어떻게 우군을 구축했는지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즉, 강 회장 사퇴압력을 신문들이 일제히 ‘관치금융의 부활’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관리들은 이해할 수도, 용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틀림없이 강 회장 측이 그동안 언론을 이런저런 수단으로 꼬드겨서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거기서 느낀다. 아, 정부는 언론보다도 더 늦게 변하는구나.



한국거래소 이정환 이사장 사태를 보고도 강 회장이 반기를 드는 것을 보면 좀 바뀐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도 ‘민’은 여전히 ‘관’을 두려워한다.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 재정부 차관이 참석하는 것을 금통위원들에 대한 압력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이 서글프다.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들이, 그것도 학식과 권위를 갖춘 전문가들이 차관 눈치를 보고 영향을 받는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관치의 상흔이 깊다고 해야 할지, 금통위원들의 소신 없음을 탓해야 할지 모르겠다.



통상 후진국은 ‘군’이 득세하고 개발도상국은 ‘관’이 주도한다. ‘민’이 큰 소리 치기에는 아직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한 모양이다. ‘군관민’에서 ‘민’이 너무 빨리 앞으로 나온 것 같다.

변재운 논설위원jwb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