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 바로 세우자-(5) 빛 못보는 초기 사회개혁 운동] 구습 타파 한마음… 한국인 일상을 바꾸다
입력 2010-01-10 19:37
기독교는 여성운동, 사회참여, 구습 및 신분 타파 등을 통해 한국인들의 일상사를 바꿔놓았다. 기독교의 전래로 눈에 띄게 변화된 것은 여성의 권리 향상이다. 집안에 갇혀 있다시피 한 여성들이 권리를 되찾게 되면서 점차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됐다. 남존여비, 남녀유별 등 유교문화와 관습 속에서 여성의 지위는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성서 보급과 한글교육 등을 통해 여성들의 정체성 확립이 시작됐다. 남녀평등 사상은 해방과 생명의 빛이었다. 교회들은 여성을 위해 성경공부, 전도활동 외에도 야간학교를 설치, 문맹퇴치와 애국교육 등에 힘썼다.
여성운동을 선도한 선교사는 메리 스크랜턴이었다. 1897년 10월 31일 감리교 여성운동단체인 조이스회가 조직되고, 1897년 12월 31일 정동감리교회에서 남녀가 합석해 남녀동등 문제를 토론했다. 또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여성운동은 교육과 계몽, 전도로 이뤄졌다. 1898년 평양 널다리교회에서 여전도회가 처음 조직된 뒤 1908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가 만들어졌다. 전도 사업이 주였지만 여성들의 사회참여 의식을 촉발시켰다. 북감리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여성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진행했다. 남감리교회는 각 선교부에 여자관 혹은 사회관을 두었다. 함남 원산에서 노울즈 여선교사가 ‘보혜 여자관’을 시작했다. 원산 남촌교회 아래 초가집을 마련하고 부인들을 모아 성경과 한글을 가르친 것이 계기였다. 이 여자관을 중심으로 학교에 가지 못하는 부인들이 교육을 받았다. 형편에 따라 계절반이나 야학을 운영했다. 때로는 사경회를 겸한 여성교육도 실시했다. 프로그램은 어린 아이와 산모의 위생교육, 재봉, 양재, 요리법, 위생사업, 여성 계몽 등이었다.
교단별로 여전도회가 조직되면서 여성의 민주 역량도 갖춰지게 됐다. 민주적 회의 진행, 조직운영을 통해 사회 능력도 향상됐다. 독립운동에도 여성의 참여가 늘어났다. 기독교 여성의 사회참여는 1907년 일제의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다. 1920년대에는 초교파 범국민적 절제운동으로 확산됐다.
한편 기독교는 악습과 폐단도 교정시켰다. 폐습 중 가장 큰 것이 축첩, 즉 일부다처제였다. 대부분 미국 선교사는 십계명에 근거해 개인 윤리를 강조하고 일부일처제를 주장했다. 당시 조혼은 구습이었다. 기독교는 가정의 신성과 행복, 평화를 위해 이를 타파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담배의 해악을 여러 차례 신문을 통해 밝혔다. 흡연이 도덕 향상과 신체 정결, 건강과 경제에 크게 문제가 있다고 금지했다. 교회는 선교적, 사회정화 차원에서 금연을 ‘준교리화’해 결국 전통이 되게 했다. 금주, 도박 금지로 도덕적 향상을 꾀했다.
1897년 4월 14일자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는 “우상이라 하는 것이 보고 듣고 말하고 운동함이 없는 죽은 물건이라. 무슨 영험이 있으리오. 슬프다 세상 사람의 우상을 숭배함이여. 당장에 살아 있는 부모의 뜻을 순종치 아니하고 근심을 끼치다가 부모가 죽은 후에 그 신주에게 제사를 지내며 효도를 다한다 하느냐”라면서 우상 숭배와 그릇된 효도에 대해 경고했다.
기독교는 근대 시민으로서의 주권의식도 심어주었다. “만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메시지는 신분제 타파의 기폭제가 됐다. 남양교회를 다니던 박정렬씨는 자기 집 계집종을 속량해 수양딸로 삼고 가족처럼 지냈다. 황해도 금천의 범내감리교회 속장 이연철은 노비가 많았는데 5명의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그 가족까지 속량해주면서 “자유로이 살면서 주를 진실히 믿으라”고 권했다.
교회는 백정해방 운동도 선도했다. 백정은 호적에서 제외된 천민 계급으로 가장 비천한 집단을 형성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백정이 많아지자 승동교회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등 신분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양반들의 강력한 반발 속에서 무어 선교사는 정부에 탄원, 백정이 평민 신분을 갖게 했다. 1898년 초 승동교회에는 백정 132명이 입교했다. 그 중 박성춘은 장로가 됐고 그의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가르치기까지 했다. 이처럼 기독교는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기독교인들은 부정과 부패에도 항거했다. 일부 지방 수령들은 부정에 항거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동학교도’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투옥시켰다. 지방수령으로 발령받은 일부 부패한 관료들은 야소교(개신교)가 있는 마을에는 부임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기독교인들은 1896년께부터 국왕의 탄신일을 맞아 축하하는 모임을 갖고 충군애국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독립협회와 협성회에 참여해 민권신장과 자주독립운동을 펼쳤다. 한국 최초의 근대 정치단체이자 한글보급과 독립신문 등으로 계몽을 선도했던 독립협회는 기독교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핵심 인물인 윤치호 서재필 남궁억 이상재 주시경 이승만 등이 모두 기독교와 연관이 있다. 배재학당 학생회를 중심으로 구성된 후 시민단체로 발전한 협성회에도 기독교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독립협회 주도로 열린 만민공동회는 민주주의를 이뤄가는 통로였다. 이러한 운동은 YMCA, YWCA 활동으로 이어지면서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시민 인식과 생활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서영석 협성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