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애옥] 말의 유희

입력 2010-01-10 19:28


얼마 전 만담가 고 장소팔 선생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청계천 변에 자리 잡은 낮고 친근한 모습의 동상은 위용을 앞세운 다른 동상들과 달라 인상적이었다. 감칠맛 나는 유머로 과거 서민 정서를 풍요롭게 해주었던 만담의 부활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차남 장광혁 이사장(장소팔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내 책 ‘엣지 있게 글쓰기’ 교정을 해주신 인연으로 귀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 몰래 만담 LP를 듣느라 헤드폰을 끼고 숨 죽이며 키득거렸던 장소팔·고춘자님의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와병 중인 순간에도 “내가 왜 죽는지 아느냐? 심심해서 죽는다”는 유언을 남기신 장소팔 선생을 닮아 그의 아들 장광혁 이사장도 모든 대화에 익살과 해학, 긍정의 기운을 실어 전하는 분이다.

주변에 이런 말의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언어활동에 행간을 줌으로써 마음의 여유와 아름다운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한자와 우리말을 조합한다든가,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 신조어를 순간적으로 만들어 전달한다든가 하는데 그 여운이 유쾌한 경우 그 말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폭설을 바라보며 모두들 안타까워하는 상황에서 한 친구가 눈(眼)에 눈(雪)이 들어가니 눈물(淚)이냐 눈물(雪水)이냐며 주변 사람을 웃게 만들고 눈 치우는 일이 덜 힘들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일을 동음이의어 놀이로 보여주었다. “불만 있으세요?”라고 다소 도전적으로 말하면 “불만이요? 라이터도 괜찮습니까?”라고 응수해 대화의 긴장을 풀었던 에피소드를 기억한다.

사자성어를 유머러스하게 만들고 운을 넣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보내기도 한다. ‘기대충만 존꿈꿔유 내꿈꿔유’ 식의 문자를 받으면 슬그머니 미소부터 올라온다. ‘우린 사이다를 같이 마신 사이다’라고 소개하는 커플 앞에 썰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마음의 준비만 있으면 얼마나 귀여운 커플인가.

우리 어법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 하여 세종대왕께 죄송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된장녀, 꿀벅지, 루저녀 등 별의별 신조어가 계속 생겨나는데 일부의 우려나 거부감도 있지만 언어의 유희도 그 바탕에 사랑이 잠재되어 있는 인간사를 대변하는 하나의 피조물로 간주한다면 삶의 활력소로 승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냉소적인 태도로 독소를 뿜어내는 언어의 유희는 절대 사양이다. 타인의 영혼에 상처를 주는 말의 유희는 그 말을 뱉어내는 화자의 영혼에도 스크래치되어 얼룩을 남길 것임을 믿는다.

공자는 논어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말의 힘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아는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할 말을 가진 인간이 곧 인격이 아니겠는가.

어젯밤 칼럼 원고 마감이 임박하여 스트레스 받는다 하니 한 친구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굿나잇, 너는 굿살사(살며 사랑하며)!” 말의 유희가 진정 축복의 놀이인 순간이다.



김애옥(동아방송예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