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징용자 유골 첫 현지조사] 인적 끊긴 기후현 폐광촌, 그곳에 어머니와 아들이…
입력 2010-01-10 20:37
일제 강점기 시절 민간인 노무동원 희생자들의 유골을 올해부터 봉환키로 한 것은 우리 정부가 일본 현지에서 첫 공식 조사를 벌여 거둔 결실이다. 특히 올해는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은 시기여서 국권 피탈 당시의 아픔을 반추하고 이를 발전적으로 극복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작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골 확인의 한 현장=2007년 8월 30일 오후 일본 주부 지방 기후현 북쪽에 위치한 히다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오일환 유해팀장은 이 지역의 험준한 산 속에 들어와 있었다. 일제 강점기 한인 노무자들 유골이 이곳 광산촌 근처에 보관돼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본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조사에 나선 길이었다.
산림이 울창한 히다시에는 많은 광산과 탄광이 있었는데, 수많은 조선인이 이곳에 강제 동원돼 혹사당하고 그 가운데 일부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처연히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오 팀장을 비롯한 조사단 일행은 버스도 다니지 않는 가파르고 외진 산길을 힘겹게 걸어가다 인적 드문 조그만 사찰 엔조지(円城寺)에 당도했다. 이곳에는 노무동원 희생자들의 유골 18위가 보관돼 있었다.
조사단은 유골함 안팎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중 뜻밖에 가슴 아픈 사실을 발견했다. 당초 사찰이나 일본 정부 측에서 알고 있기로는 완전히 남남 사이였던 두 사람의 유골이 실은 어머니와 아들 관계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오 팀장은 경북 달성군(현 대구시) 출신 서판조(徐判祚)씨 유골을 확인하고 다른 몇 명의 유해를 조사한 뒤 김소년(金小年)이란 이름의 유골함을 조사했다. 그러다 유골함을 싼 보자기 한 편에 ‘嗣子 徐判祚’라고 쓰인 글씨를 발견했다. ‘嗣子(사자)’는 대(代)를 잇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좀더 조사해 보니 사실관계가 분명해졌다. 서씨는 어머니 김씨가 1941년 사망하자 그 유골을 엔조지에 모셨는데, 6년 후인 1947년 본인도 사망해 결국 같은 사찰에 납골된 것이었다. 그 후로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60여년의 세월이 흐르며 유골의 존재는 망각 속에 파묻혔다.
◇일본 전역에 걸쳐 실지조사가 이뤄지기까지=2004년 12월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물꼬가 트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노무동원자 유골에 대한 수습과 봉환을 협조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답변했다. 이후 양국 정부는 ‘한·일 유골협의’를 진행해 2005년 5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국장급 회의 6회, 과장·팀장급 실무협의 9회 등 공식 회의만 총 15회 가졌다.
확인 작업은 크게 실태조사와 실지조사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우선 문서상으로 현황이 어떤지 파악하는 실태조사는 전적으로 일본 정부가 담당했다. 일본 정부는 징용 조선인을 고용했던 100여개 기업을 비롯해 지방자치단체, 종교단체 등에 징용자 명부 유무, 유골 안치 장소 등을 묻는 ‘조사표’를 보냈으며 회답이 오는 대로 자료를 집계했다.
이어 유골 안치 시설을 일일이 찾아가 실제 유골 유무와 보관 상태 등을 확인하는 실지조사에 착수, 모두 143회의 현장조사가 이뤄졌다. 이 결과를 취합해 일본 전역 310곳에 흩어져 있는 징용 노무자의 유골 2601위를 확정할 수 있었다. 조사단은 한 공간에 수십, 수백명분이 뒤섞여 있는 합장 유골은 제외하고 개별성이 분명한 유골만 집계했다.
◇지난한 신원 확인 작업, 그래도 계속된다=규명위는 나아가 유골의 구체적 신원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유골함 안팎에 기재된 사망자 정보, 안치 시설에서 보관 중인 납골 장부, 관할 지자체에서 열람할 수 있는 매장·화장 인허가증, 그리고 규명위에 신고된 징용자 신상정보 등을 다각도로 대조했다.
그러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한인 유골인 것은 알겠지만 대부분 유골이 ‘千上梅子’ ‘安田石枯’ 등 창씨명만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본적지 기록 역시 애매하게 적혀 있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宋貴德 中村八次郞 朝鮮全羅南道寶城郡文德面相山里(송귀덕 중촌팔차랑 조선전라남도보성군문덕면상산리)’와 같이 한국명과 창씨명, 본적지가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으면 작업이 용이하지만 이런 경우는 희박해 추적 가능한 대상이 10% 미만이었다. 규명위 측이 유골 신원을 확인한 것이 지금까지 52위에 불과하지만 이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성과가 좀 더 나올 전망이다.
특별기획팀=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