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10) 사업 자금 빌리러 갔다 평생의 반려자 만나

입력 2010-01-10 17:40


스물아홉 나이에 인생을 걸고픈 일을 발견했다. 원단을 개발해 판매하는 섬유업이었다. 그 첫 발을 떼려면 광장시장의 점포 지분 절반인 200만원이 필요했다.

교회 아동부 교사회의에 나가서도 그 돈을 구할 방도를 생각하다가 문득 동료 교사인 김성환 권사님에게 눈길이 갔다. 당시 예순쯤이셨던 권사님은 열아홉에 교회학교 교사를 시작, 일흔까지 하셨던 분이다. 교사들을 집에 초대한 적이 여러 번이라 그분 생활이 넉넉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주저하다 결국 댁으로 찾아갔다.

설명을 드리니 권사님은 그 자리에서 선뜻 돈을 빌려주셨다. 마지막 희망을 걸긴 했지만 ‘내 어디를 보고 그 큰돈을 빌려주시겠나’ 했던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무척 성실하게 봐 주셨나 보다’ 하고 이해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 나는 형님의 권고로 선을 보러 나가기로 돼 있었는데 아동부 교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권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박 선생, 오늘 선 보러 나가지 말게.” “네? 왜 그러세요?” “내 외손녀 미순이를 알지? 선 보는 대신 미순이를 정식으로 만나보게.”

그분 외손녀라면 댁에 초대됐을 때 본 일이 있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인, 신앙심 깊고 귀염성 있는 처녀였다. 그러나 그때 나는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선도 형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본다 했을 뿐이지 돈 벌어 기반을 잡은 뒤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기댈 곳 없고 당장 밥벌이도 어려운 처지인 것을 잘 아시는데 그토록 믿어주시는 마음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아내(소망교회 이미순 권사)와 만났다. 교회학교 교사로 함께 봉사하다 1년쯤 후 결혼했다. 아내를 만난 것이 내가 지금껏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4~5대째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늦게 믿기 시작한 사람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은 없어도 평생 꾸준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검소하게 살아 왔고 나의 가장 좋은 동역자이자 조력자였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가족이 된 김 권사님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빌린 돈은 오래지 않아 이자까지 쳐서 갚아 드렸다.

나에게 동업을 제안한 김교섭 회장은 지금 내 회사 이름이기도 한 ‘보창’이라는 회사를 운영했고 그 밑에 대림, 메트로 등 회사를 뒀는데 내가 처음 맡은 것이 메트로였다. 원단을 연구해 하청 공장에 주문하고, 완성품을 도매로 전국에 팔거나 의류 회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김 회장은 일본에서 공부해 일본의 발달된 섬유산업에 밝았다. 나를 만나기 전 이미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뒤 섬유업계 최고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새 생산 설비를 들인 방적회사들은 대부분 김 회장을 찾아와 신제품 개발 논의를 했다.

무작정 뛰어들었지만 나에게 잘 맞는 일이었다. 남이 만든 것을 받아 파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좋았다. 한번 정신을 쏟기 시작하니 머릿속에는 ‘어떤 원단을 만들까’라는 생각이 가득 찼고, 눈은 길 가는 사람들이 입은 옷을 살피는 데만 쏠렸다.

사업의 중요한 부분이 방적회사들이 들고 오는 ‘미션’, 즉 개발 의뢰를 잘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야 신뢰를 이어갈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최대 방적회사였던 방림방적에서 나에게 어려운 일 하나를 맡겼다. 정리=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