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석학칼럼-리처드 포스터] 등산과 예배경험

입력 2010-01-08 17:34


언젠가 다 자란 우리 아들 네이던과 함께 콜로라도 로키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앨버트산(4399m)에 오른 적이 있다. 아버지에게나 아들에게나 이건 힘겨운 과제였다. 정상까지 정복하는 것이 나의 과제였고 내가 숨을 몰아쉬는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는 것이 아들의 과제였다. 잠시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미루나무 숲은 바야흐로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끝없이 뻗은 암반층 계곡으로 냇물이 굽이굽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와 아들은 아침 일찍 숲을 헤치며 구불구불 걸어 올라갔다. 수목 한계선을 넘어서고부터는 오르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산세가 몹시 가팔랐다.

바라보이는 건 온통 화강암뿐이었지만 나처럼 천천히 걸어가는 등산객은 알프스해바라기, 설산 미나리아재비, 이끼석죽, 노랑 꿩의 비름, 요정 앵초 등 다양한 고산식물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 150m는 가장 험준했다. 네이던도 멈춰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걸 보고 난 통쾌했다. 4200m를 넘은 고지라서 그런지 호흡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온갖 노고를 무릅쓰고 정상에 첫발을 딛는 순간, 희열과 함께 기막힌 경치가 펼쳐졌다. 일망무제다. 마치 세상 꼭대기에 서 있는 듯, 매시브산, 하버드산, 기타 4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밑으로 내려다보인다.

북으로는 롱스봉 꼭대기, 남으로는 파이크스봉 정상이 경이로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서쪽의 설봉은 새로 흩뿌린 눈으로 새하얗게 장식되어 있다. 머룬벨스를 보는 순간엔 말 그대로 숨이 멎는 것 같다. 이날은 날씨조차 완벽했으므로 우린 산정에 한 시간 이상 머물며 침묵에 잠긴 채 끝없이 펼쳐진 경치를 즐겼다. “산들은 수양같이 뛰논다”(시 114:4)는 시편 기자의 말이 확실히 옳았다.

이제 등산 이야기를 거울 삼아 예배를 통한 심령의 갱신에 대해 얘기해보자. 예배는 때로 초록빛 숲 속을 거니는 것과 흡사하다. 거기에는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어떤 경우 예배는 수목한계선 위의 험준한 오르막 같을 때도 있다. 맹목적인 침묵이나 엄숙한 영창처럼 힘겹고 경직되어 있고 단조롭다. 그러다가 끈질기게 인내하며 진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예배의 정점에 올라 자유를 맛본다. 헨델의 메시아나 바흐의 B단조 미사곡처럼 모든 것이 경이롭고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우리에게는 이 다양한 예배 체험이 모두 필요하다. 어느 한 경험에만 완벽히 침잠하는 것은 과도한 일일 수도 있다. 숲 속의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이 필요하지만 언제나 만화경 같은 다양성만 있으면 오히려 정신이 산란해질 것이다.

산 정상에서 경험하는 바와 같은 경이, 일망무제, 상쾌함이 필요하지만 계속해서 산꼭대기에만 있으면 나중엔 녹초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예배 경치 속으로 들어가 숲 속의 다양성, 수목한계선 위의 힘겨움, 산 정상의 황홀경을 두루 경험하며 언제나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하기를(대상 16:29) 힘써야 하리라. 그리스도의 평화와 기쁨이 가득하길 빈다.

리처드 포스터(국제레노바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