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째 매월 가족회의 갖는 조남중씨 가족… 돌아가며 3분 스피치 “오늘은 해피데이”

입력 2010-01-08 17:39


요즘 한집에 살면서도 하루 한끼 같이 식사하기 힘든 가족이 적지 않다. 일주일에 한번 오순도순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갖지 못하는 가족들도 많다. 제각각 바쁘다보니 그렇다는 변명이 조남중(82·인천 동춘동)씨 가족 앞에선 무색해진다. 조씨네는 아들 넷, 딸 둘, 손자 손녀 등 스무 명이 넘는 대가족이 한달에 한번씩 가족회의를 하고 있다. 올해로 26년째다.

올해 첫 가족회의는 지난 1일 조씨의 맏아들 철연(55·사업·인천 연수동)씨 집에서 했다. 이날은 정초인 만큼 세배를 나눈 뒤 새해계획을 주제로 회의를 했다. 조씨부터 시작해 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3분 발언을 하고, 서기를 맡은 셋째 아들 수연(44·대전 지족동)씨가 메모를 했다. 수연씨는 “이것이 바로 우리 가족의 역사”라며 두툼한 노트를 보여준다. 이런 노트가 10권도 넘는다고 했다.

교장으로 은퇴한 조씨는 기후온난화와 녹색에너지에 대해 설명한 뒤 우리나라가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한다는 모두발언(?)을 했다.

철연씨는 “늦게 익히기 시작한 중국어에 드디어 귀가 뚫렸는데, 올해는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맏며느리 서병희(52)씨는 노인교육전문지도사 과정을 올 초에 끝내고 사회복지사 2년 과정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철연씨와 서씨의 ‘열공 모드’에 어린 조카들은 잠시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우리도 열심히 해야지” 결심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어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애들한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백번 말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둘째아들 호연(52·사업·경기 용인 수지)씨는 “올해는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둘째 며느리 이종순(51)씨는 “성전 꽃꽂이 봉사를 할 계획이고, 요리를 배우고 있는데 다음 모임 때 솜씨를 발휘하겠다”고 밝혔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입맛 다시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맏딸 미연(49·인천 동춘동)씨는 “올해는 메모습관을 들이고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에 힘쓰겠다”고 했다. 조씨는 “어려운데도 공부 열심히 해 성공한 학생이 쓴 책을 주문해두었다”며 손자 손녀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둘째 사위 강지명(48·사업·인천 간석동)씨는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면서 올해도 마라톤을 뛸 것이라고 밝혔다. 조씨는 “모두들 건강에 최우선으로 신경 쓰라”고 하면서 강씨에게는 “무리는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서로 격려하고 걱정해주느라 스피치 시간 3분은 두세 배로 늘어났지만 그만큼 가족의 정도 쌓일 터이니 무슨 걱정일까.



수연씨는 “얼마 전 고분자 관련 문제를 풀었는데, 정말 환희가 느껴졌다”며 조카들에게 이공계 전공자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임을 강조했다. 셋째 며느리 김도희(42)씨는 “회사일도 바빠서 귀가가 늦는 데다 집에 와서도 서재에만 있어 아이들에게 아빠의 부재가 너무 크다”고 걱정했다. 그러자 모두들 수연씨에게 반성하라고 한마디씩 했고, 김씨는 싱긋 웃었다. 김씨는 “둘이서 이런 얘기 하면 싸움이 되기 십상인데 가족회의 때 하면 부드럽게 넘어가고 다음 회의 때 잘하고 있는지 점검 들어가 효과 만점”이란다. 가족회의에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덤이다.

막내아들 명연(41·신부·인천 간석4동)씨는 “올해는 그동안 한 강의를 모아 책을 쓰겠다”고 했다. 어른들에 이어 아이들도 저마다 새해 계획을 발표했다. 큰아버지 내외의 열공 모드에 할아버지 당부 말씀까지 겹쳐선지 모두들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대가족의 막내 성혁(12·초5·수연씨 둘째 아들)군은 워드 3급 자격증을 따겠다는 결심까지 발표했다.

강씨는 “처가 회의 문화가 너무나 좋아 본가에서도 하기로 했는데, 바로 오늘 첫 모임이 있다”면서 “아내는 준비하느라 못 왔고 저도 일찍 가야 된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다음 모임이 공지됐다. 20일이 어머니 생일이니 모이고 그때 다음 가족회의 날짜는 정하겠다고 철연씨가 말했다.

호연씨는 “모든 사람이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그 원동력은 가족에서 온다”면서 서로에게 힘을 주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가족회의날은 ‘해피데이’여서 어떤 약속보다 우선한다고 했다. 3세대의 맏주자인 성빈(26·한양대 3)군은 “가족들의 기대가 느껴져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게 된다”면서 “동생들을 인솔하다보니 리더십도 생겼다”고 했다.

가족회의를 시작할 때는 가족이 열명도 채 안 됐는데 지금은 21명이나 된다. 6남매가 돌아가면서 회의를 주최한다, 가족회의가 이어지는 비결을 묻자 둘째와 셋째 며느리가 “큰형님이 잘해서”라고 했고, 맏며느리는 “늘 감싸주시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시는 어머님 덕”이라고 공을 돌렸다. 그러자 시어머니 이재복(79)씨는 “무슨 소리야, 며느리들이 착해서 이렇게 즐겁게 만나지”라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고부간에 서로 잘한다고 추켜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조씨도 빙그레 웃었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