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삭막한 세상,인문학에 길을 묻다… ‘인문학 콘서트’

입력 2010-01-07 18:09


인문학 콘서트/김경동 외/이숲

서울대는 최근 2년 사이 인문학 분야 교양 강좌가 20%나 줄어 ‘인문학의 위기’를 여실히 증명했다. 대학가에서 철학, 미학, 국사학과 관련 교양 강좌는 썰렁하고 기술, 경영 등 실용 강좌는 북적댄 지 오래다. 외면 받는 인문학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려고 대한민국 중견 학자 14명이 나섰다.

시사평론가 김갑수가 진행하는 KTV ‘인문학 열전’에 출연한 학자들과의 대담집. 소재는 다양하다. 인문학의 의미와 역할(김광동 김기현), 통합과 통섭 교육(최재천 김광웅), 한국 교육의 미래(문용린), 윤리와 사랑(황경식 김효은 고미숙), 환경과 생명(장회익 차윤정), 한국의 현실(도정일 박정자 김영한). 빠른 시간에 인원이 꽉 차서 들을 기회가 흔치 않은 명강의 14개를 알차게 모아 놨다.

이들은 추상적 거대담론으로 독자를 혼란시키지 않는다. 학생과 대화하듯 구어체로 쉽게 풀어서 설명하며 난해한 학술용어보다 영화를 사례로 든다.

예컨대 ‘호모 에로스, 사랑에 대한 탐구’에서 평론가 고미숙은 먼저 누구나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정작 자신은 절대로 그런 사랑을 원치 않는 이기적인 욕망을 지적한다. 그리고 영화 ‘봄날은 간다’의 명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를 인용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단적으로 드러낸 대사지만 고씨는 사랑은 본래 ‘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사랑은 현재 자기가 사유하고 꿈꾸는 바를 존재 자체로 나누는 행위’라며 이를 ‘사랑하되 사랑을 담지 않는 서사적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강의를 ‘읽다보면’ 어느새 작업의 기술에 골몰해온 요즘의 사랑을 반성하게 된다.

사회자 김갑수는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질문을 하며 독자의 가려움을 긁어준다. 아무리 인문학이 중요하다지만 실용 경영학과의 주가가 날로 치솟지 않는가, 라고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 때쯤 김갑수는 같은 질문을 학자에게 던진다. 이에 대한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답이 걸작이다.

“어느 인기학과에 학생이 많이 몰려서 북적거린다고 해서 그 학문이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학생들이 그 학과에서 필요한 지식만 얻어 취업 전선으로 나가고, 학과 자체는 학문적으로 빈곤해서 후속 세대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24쪽)

김기현 교수와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의 ‘우리 인문학의 길’을 읽고나면 인문학 필요성에 대해 재차 묻지 않게 된다. 2008년 말 전 세계를 덮친 금융위기는 인문학의 부재가 부른 재앙이라는 주장은 설득력 있다. 우수한 두뇌를 가진 젊은이가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월가로 들어가 만든 합작품이 금융위기다. 이들이 돈을 버는 데보다 어떻게 벌 것인가와 같은 인문학적 성찰을 조금이라도 했더라면 어땠을까.

실용학문에서도 방향을 제시하고 가치의 경중을 헤아리기 위해 인문학이 전제돼야 한다. 이는 다른 학문과 인문학의 통섭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새롭고 낯선 유혹, 통섭’에서 학문의 기초로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또한 현재 답을 못 찾고 부글부글 끓고 있는 ‘대운하 문제’는 운송, 관광, 환경, 국민의 정서 등 다양한 요소가 혼재돼 있기 때문에 해결을 위해서는 ‘통섭적 인식’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책은 강의 내용과 관련 있는 저자의 책을 소개하며 ‘책 속의 책’을 담고 있다. 또한 주석을 활용해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다. 신기한 점은 14명의 학자가 표면적으로는 다른 주제를 천착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서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가 ‘왜 책이어야 하는가’에서 삶의 질은 돈이나 부동산의 유무가 아니라 내적인 자산에서 결정된다며, 조깅하면서도 시를 암송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부자가 아니냐고 되묻는데, 이는 앞서 김경동 교수의 주장과 겹쳐진다. 이처럼 학자들이 내는 유사한 목소리는 페이지를 표시해 의견을 비교할 수 있는 재미를 준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