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바타 혁명’ 한국은 지금… 대세? 유행? 판은 이미 벌어졌다

입력 2010-01-07 17:39


풍문이 나돌았다. 홀연히 사라진 무림고수는 심심산천에 은거한 채 세상이 바뀔 새 권법을 연마하고 있다고 했다. 저잣거리 필부들이 쑥덕댔다. “그가 돌아오는 날, 혁명이 시작될 거래.” 그리고 2009년 12월 17일, 비기(秘技)로 무장한 그가 돌아왔다.

훗날 역사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3D(3차원) 영화 ‘아바타’ 개봉일을 세계 영화의 혁명일로 기억할지 모른다. 1998년 ‘타이타닉’으로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휩쓸며 “나는 세상의 왕”이라 외쳤던 캐머런 감독. 과연 12년 뒤 ‘왕의 귀환’은 떠들썩했다. 그가 절치부심 만들어낸 ‘아바타’는 한국 개봉 3주 만에 관객 717만명을, 세계적으로 11억 달러(약 1조2500억원) 흥행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2010년 새해 벽두 한국 영상산업계를 뒤흔들고 있는 ‘아바타 혁명’을 논하기에 흥행실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162분간 관객의 시각은 영화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높이에서 고공비행했다. 3차원 현실을 2차원 스크린 위에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 ‘아바타’는 모든 영상 예술가가 꿈만 꾸던, 진짜 같은 가짜의 세계를 두드렸다. 놀랍게도 문은 열리고 있는 듯했다.

문틈으로 보이는 저곳은 영상의 미래인가. 115년 영화사를 군림해온 2D 영상의 세상은 저물어 가는가. 지금 충무로와 방송가에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더불어 할리우드발 ‘아바타’ 태풍에 휘말린 한국 영상산업계의 생존 몸부림도 거세지고 있다.

충무로는 3D 논쟁중

지난해 말 최익환 감독의 3D 실험단편영화 ‘못’ 시사회장은 충무로와 방송계 인사 수백명이 몰려 초만원을 이뤘다. 영화진흥위원회 후원으로 제작된 이 영화를 본 뒤 사람들은 객석과 복도에 삼삼오오 모여 3D의 미래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의견은 갈렸다. ‘3D가 영상의 미래’라는 3D 대세론이 떠들썩한 가운데 반대편에선 ‘3D는 한때 유행’이라는 회의론이 맞섰다.

“2D 영화는 죽었다.” 충무로에서 3D 대세론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엽기적인 그녀’의 곽재용 감독은 아예 사망선고를 내렸다. 근거는 ‘아바타’ 체험이었다.

“영화 ‘아바타’를 보고 2D가 죽었다는 생각을 했다. 3D의 위력이 압도적이었다. 조만간 2D는 관객에게 재미가 없어져 버릴 거다. 예술로서 흑백영화는 존재하지만 흑백이나 무성영화가 대세는 아니지 않은가. 2D는 흑백영화 신세가 될 거다. ‘아바타’에서 3D 영화 문법이 처음 만들어진 것 같다. 1941년 오손 웰스가 ‘시민 케인’으로 2D 문법을 정립했다면 3D에선 그걸 ‘아바타’가 해냈다.” 곽 감독은 현재 3D 에로스릴러 영화 ‘메모리’(가제)를 준비 중이다.

국내에서 3D 실사영화 제작경험을 가진 이는 ‘못’의 최익환(‘여고괴담 死’) 감독이 거의 유일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회의파로 돌아섰다. 최 감독은 나흘간의 3D 영화 촬영 경험을 ‘영화의 기본으로 돌아온 과정’이라고 요약했다.

“3D 카메라 렌즈를 바꾸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힘들고 돈과 시간 다 많이 든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실감난다고 관객이 감동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영화는 숨기는 게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3D처럼 더 많이, 더 자세히만 보여주는 게 다가 아니다. 작업 후에 회의적이 됐다. 2∼3년간은 붐이 일겠지만 그 이후는 모르겠다.”

대세론과 회의론 사이에는 더 많은 관망파와 중도파가 머뭇대며 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3D가 SF와 판타지, 호러 등 특정 장르의 내러티브 효과를 극대화하는 영화기법 혹은 별도의 장르로 안착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있다.

3D 영화의 수익모델 전망 역시 현재로선 엇갈린다. 3D 영화 관람료는 1만2000∼1만6000원으로 8000∼9000원인 2D 영화보다 50∼100%나 비싼 반면, 제작비(할리우드 기준)는 1.3배 정도 더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계산대로라면 3D는 크게 벌 수 있는 판이 된다. 게임에 난타당하고 불법 다운로드에 뒤통수 맞은 영화시장을 살릴 비밀병기가 3D가 되리란 기대도 높다. 그러나 판이 크다는 말은 크게 잃을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할리우드에 비해 인프라, 기술, 투자 모두 영세한 한국에서 3D는 위험한 도박일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충무로의 돈과 사람은 3D를 향해 몰려가고 있다. ‘관객 1000만명 클럽’의 스타감독 2명이 먼저 깃발을 들었다.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은 서해교전을 다룬 ‘아름다운 우리’를,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은 괴수영화 ‘제7광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들이 받아들 관객 성적표가 한국 3D 영화의 판도를 바꾸게 될 것이다.

안방극장의 3D 전쟁

지난 1일 0시.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가 24시간 3D 위성채널 스카이3D를 시험 송출하기 시작했다. 3D 전용 채널이 생긴 것도, 24시간 방송이 시도된 것도 한국이 세계 최초다. 10월에는 지상파에서도 풀HD 3D 시험방송이 시작된다. 킬러 콘텐츠(‘아바타’)가 선도한 3D 영화 시장과 달리 구매자가 먼저 나서서 장이 선 형국이다.

현재 스카이3D에서는 애니메이션 ‘아기고래구출작전’ 등 15분 안팎의 프로그램 26편(총 6시간 분량)이 하루 4차례 반복 방송되고 있다. 그나마 이중 2시간 분량은 미국 일본 등지에서 수입했다. 나머지 19편 4시간이 현재 국내에서 확보할 수 있는 3D 방송 콘텐츠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된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수백억원 규모의 블루오션이 일거에 열린 것이다.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서울 흑석동 아트센터에서 열린 채향순중앙무용단의 3D 녹화장. “다리 아프시겠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죄송합니다.” 알록달록한 무대의상을 입고 조명 아래 서 있는 무용수들을 향해 독립프로덕션 허브넷의 김병민 제작본부장이 미안한 웃음을 흘렸다. 김 본부장이 이번엔 왼쪽을 바라보고 소리쳤다. “RA(카메라 두 대의 높이)가 안 맞잖아. 그래, 됐다. 어, 어, 어. 흔들린다. RA가 또 안 맞잖아.” 김 본부장은 벌써 30분 넘게 카메라를 갖고 씨름 중이다.

3D 영상 제작의 핵심은 두 카메라가 인간의 눈처럼 완벽하게 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입체의 질을 결정하는 건 두 카메라를 한 몸처럼 연결해주는 ‘리그(rig)’의 성능이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이 장비를 허브넷 촬영팀은 자체 제작해 사용하고 있다. 카메라 각도 조절 등 제작 노하우도 실전에서 부딪치며 체득해 나가는 중이다. 벌써 수중촬영 등 자연 다큐에도 도전했다.

한편에선 미국 기술을 들여와 한국화하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순 한국HD방송은 미국 장비업체 3Ality로부터 장비와 기술을 들여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FIS 스노보드 대회를 촬영했다. 3Ality는 U2 공연실황 제작으로 유명한 3D 방송업계 선두그룹. 제작비 5억원이 투자된 스노보드 대회 영상은 국내 제작 3D 콘텐츠 중 가장 안정적 실사 화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 3D 방송의 고민은 입체감이 아니다. 되레 얼마나 입체 같지 않은가가 3D 방송의 성패를 가를 확률이 높다. 시청자들이 구토나 어지럼증 같은 부작용을 호소하는 순간, 3D 방송 산업은 싹을 틔워보기도 전에 공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입체화면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 3D 방송은 안방시장에 안착할 수 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현재 스카이3D는 프로그램마다 ‘30∼60분 시청 후 5∼15분 휴식하는 게 좋다’는 안내 자막을 내보내고 있다. 자체적으로 만든 일종의 시청 가이드라인이다. 방송통신위원회 오용수 전파관리과장은 “3D 방송이 유발하는 시각 피로와 안전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화질 등을 표준화하고 가이드라인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3D(Three Dimensions·3차원) 영상

사람의 좌우 눈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영상을 본다. 두뇌는 두 영상을 합성해 대상물을 입체로 인식한다. 기존 2D 영상이 평면인 것은 눈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카메라 1대로 찍는다는 얘기다. 3D는 인간 시각에 착안해 카메라 2대로 입체영상을 만들어낸다. 리그(rig)라고 불리는 장비로 카메라 2대를 연결해 사람의 눈 한 쌍처럼 만들었다. 현재 대부분의 3D 영상은 특수안경을 쓰고 봐야 한다. 관객의 두 눈이 두 카메라가 찍은 2개의 영상을 따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왼쪽 카메라가 찍은 화면을 왼쪽 눈이 보고, 오른쪽 카메라 영상을 오른쪽 눈이 보는 식이다. 이때 두 카메라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입체감은 커진다. 좌우 카메라가 찍은 영상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이영미 김원철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