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이 만들어 낸 기적 ‘글리벡 베이비’… 30대 백혈병 산모의 목숨 건 출산

입력 2010-01-07 18:16


“낳아도 거의 100% 장애아예요. 못 낳아요.”

수화기 너머 간호사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래도 의사선생님과 상의하고 싶은데….”

“병원 오셔봤자 똑같아요.”

휴대전화를 끊은 주부 장영심(38)씨는 서울 사당동 이수역 사거리에서 1시간여를 덩그러니 서 있었다. 생리가 멈춘 게 이상해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임신 5주 진단을 받고 나온 뒤였다.

만성골수성 백혈병 환자인 그는 항암제 ‘글리벡’을 다섯 달째 먹고 있었다. 글리벡을 복용하면 장애아 낳을 확률이 100배 높아진다. 의사는 “몸도 그러면서 조심하지 그랬냐”고 했다.

걱정이 앞서 산부인과를 나서자마자 백혈병 치료를 받던 서울성모병원(반포동)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간호사는 끝내 진료 예약을 해주지 않고 이렇게 얘기하며 ‘결단’을 촉구했다. 여성 백혈병 환자가 애 낳기란 불가능하다, 낳아도 장애아일 확률이 높다, 태아가 더 크면 중절 수술을 하려 해도 지혈이 안돼 위험하다…. 2007년 8월 이수역 사거리에서, 장씨는 그렇게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선택

장씨는 피부미용관리사로 일하며 아이 셋 키우느라 건강검진 한번 제대로 받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5개월 전인 그해 3월 간단한 검사 몇 가지를 받다가 혈액 1㎣당 5000∼1만개여야 할 백혈구가 5만개 이상이란 진단을 받았다. 백혈구 수치를 조절하는 글리벡을 하루 4알씩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덜컥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시어머니(81)와 남편 이택근(50)씨는 출산을 극구 말렸다. 아기를 낳으려면 1년간 글리벡을 끊어야 한다. 평생 먹어야 하는 약을 중단하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다. 글리벡을 계속 먹으면 그만큼 장애아 출산 확률이 높아진다. 장씨에겐 이미 성빈(18) 한빈(13) 찬빈(9) 삼형제가 있다. 1주일 뒤 남편은 장씨를 데리고 중절 수술을 받으러 한 산부인과에 갔다.

그러나 병원에서 중절 수술을 거부했다. 백혈병 환자는 지혈이 잘 안 돼 자칫 장씨마저 위험해진다고 했다. 장씨는 그날로 짐을 싸 경기도 파주의 한 기도원에 들어갔다. “너무 힘들었어요. 하루 종일 기도하고 또 하고…. 그러다 하늘이 준 생명을 내가 버리는 건 잘못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사흘 뒤 장씨는 집에 돌아와 아기를 낳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 김동욱 교수(현 서울성모병원 분자유전학연구소장)를 찾아갔다. 국내 만성골수성 백혈병 환자 2500여명 중 약 1000명을 진료한 전문가다.

“보호자 데려오세요.”

장씨 이야기를 듣고 난 김 교수는 보호자부터 찾았다. 이튿날 장씨와 함께 진료실에 들어선 시어머니에게 김 교수가 말했다.

“아니, 어머님 연세도 많으신데 혼자서 손자 셋을 기르실 수 있겠어요? 며느리 잘못되면 어쩌려고 출산을 허락하셨어요?”

장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어머니도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김 교수의 심중을 파악한 장씨가 일어서려는 순간 시어머니가 차분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의사선생님, 나도 말렸지만 본인이 낳는다고 합디다. 내 심정은 오죽하겠소. 하지만 며느리가 결정했으니 말릴 도리가 없잖소. 자기 아이인데….” 남편도 아기 초음파 사진을 본 뒤 “장애아라도 낳자”고 했다. 가족 뜻을 확인한 김 교수는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생명을 걸다

목숨 건 출산 준비가 시작됐다. 장씨는 다음날 바로 글리벡을 끊었다. 1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서 백혈구 수치를 검사받아야 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김 교수는 “이건 모험이에요”란 말을 했다.

“남편이 백혈병 환자일 때는 아기 낳는 데 큰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여성 환자가 출산하려면 최소 12개월간 글리벡을 끊어야 합니다. 생명을 건 모험이었어요. 약을 끊고 1주일 단위로 백혈구 수치를 검사했는데, 다행히 4000∼1만개 사이를 오갔어요. 병이 진행되지 않은 거죠. 차츰 검사 주기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순조로운 듯하던 출산 여정이 암초에 부닥쳤다. 예정일을 한 달 앞두고 태아가 거꾸로 서 있는 게 확인됐다. 병원에서는 일단 기다려 보자고 했다. 장씨는 다시 기도원에 갔다. “마음이라도 편하게 좀 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 온몸이 쑤시듯 아프더니 온통 부어올랐다.

“걱정돼서 다음날 바로 집에 돌아갔어요. 남편이 놀라서 뛰어나오더라고요. 이틀 뒤 다시 병원에 갔는데, 세상에, 아기가 다시 똑바로 서 있다는 거예요.”

만삭이면 양수가 부족해 태아가 돌아눕기 어렵다. 계속 거꾸로 있었다면 지혈이 어려운 장씨는 목숨을 건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야 했다. “효자네요.”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던 간호사의 한마디가 귓가에 요동쳤다. 그동안 애써 눈물을 보이지 않던 장씨는 이날 펑펑 울었다.

2008년 6월 24일 분만실로 향했다. 산부인과 담당의는 “글리벡 복용이 장애아 출산율을 높인다지만 완벽하게 검증된 건 아니니 한번 잘해봅시다”라고 했다. 김 교수도 외부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에서 기다렸다.

오후 3시35분.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만실을 지키던 남편이 아기를 살폈다. “일단 손가락, 발가락이 눈에 들어왔는데 5개씩 잘 붙어있더라고요. 아기 얼굴을 보니까 억눌렸던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데…. 정말 그때 기분은 뭐라 말할 수가 없어요.”

곧 김 교수가 병실로 달려와 산모와 아기 상태를 살폈다. 장애 여부 검사에서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장씨가 생명을 걸었던 10개월, 긴 여정 끝에 ‘글리벡 베이비’ 유빈이가 태어났다.

‘글리벡 베이비’

지난해 12월 25일 성탄절. 서울 동작동 언덕 꼭대기의 장씨 집으로 가는 길은 을씨년스러웠다. 언덕길 우측은 재개발로 건물이 모두 헐렸고, 좌측에만 단독주택과 다세대주택이 섞여 있다. 사람들이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하는 조용한 길의 끝에 반지하 방이 딸린 작은 단층 주택에서 시부모와 장씨 부부, 그리고 4형제가 산다.

허름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깥 공기와 전혀 다른 시끌벅적함이 있다. 안방에선 18개월 된 유빈이와 엄마의 실랑이가 한창이다. 옷을 입히려는 엄마와 귀찮아하는 아들. 곧 방문 하나가 열리더니 셋째 찬빈이가 “와∼” 하고 뛰어나와 엄마에게 매달리고, 유빈이를 밀고 당긴다.

“아이고,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녀석이 오늘 아주 신이 났구먼.” 거실 청소라도 하듯 갈아입은 새 옷으로 바닥을 쓸고 다니며 재롱 피우는 유빈이를 보면서 할머니가 말했다. 남편 이씨는 “그렇게 출산을 반대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젠 유빈이 없으면 못 사시겠대요. 복둥이래요. 유빈이 태어난 뒤로 뭐랄까… 집안에 웃음이 많아졌죠”라고 말했다.

이씨는 소방장비를 제조하는 중소기업에 다닌다. 출산 한 달여 뒤부터 다시 글리벡을 복용하고 있는 장씨는 최근 피부미용관리사 일도 재개했다. 장씨는 목숨 걸고 낳은 아기, 유빈이가 그저 고맙다고 한다. 새해에도 밝고 건강하게만 자라주길 소원한다.

“정말 기적 같이 태어난 아이잖아요. 살짝 다치기만 해도 내 살이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은데 잔병치레가 별로 없어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