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천도와 세종시
입력 2010-01-07 17:48
고려 건국 후 160년쯤 지난 숙종 때, 김위제라는 풍수쟁이가 도선의 예언이라며 한양 명당론을 주장했다. 그는 나라에 근심이 끊이지 않는 것은 개경의 지기(地氣)가 쇠한 때문으로, 한양으로 천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숙종도 솔깃해 한양에 별궁을 짓고 남경으로 승격시켰으며, 천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실현되지 못했다. 오랜 시간 개경에 기반을 닦아 둔 문벌귀족들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고려가 망할 때까지 여러 왕이 천도를 계획했지만, 매번 같은 이유로 좌절했다.
정말 지기라는 것이 있어 나라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기운’이 땅에 들러붙으면 언제나 문제가 생겼다. 도시는 도로와 건조물로 구성되는 ‘물리적 공간’일 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네트워크가 형성돼 작동하는 ‘심리적·문화적 장소’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힘 있는 사람들이 수도 전체 또는 수도의 특정 장소를 배타적으로 점거하고 그곳에 사회적·문화적 자산을 쌓아올리면, 나라 전체에 문제가 생긴다. 세습되는 비공식 권력이 생겨 국정을 흔들고, 외부와 소통이 단절돼 ‘경향(京鄕) 갈등’을 유발한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본래 고려의 신하들이었다. 동정서벌(東征西伐)하느라 말 위에서 반평생을 보낸 이성계는 조금 달랐지만, 그의 개국공신들은 거의 모두가 개경에서 벼슬아치로 기반을 닦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새 왕조 개창에는 찬성했지만 개경에 쌓아둔 재산과 네트워크가 흔들리는 건 원치 않았다. 고려 왕조의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에 새 왕조의 도읍을 둘 수 없다는 명분이 아니었다면 한양 천도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겪은 후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것도 당대 관료들이 개경에 쌓아둔 기득권을 아쉬워했기 때문이다.
서울 천도 후 반세기 동안, 새 왕조는 모든 면에서 찬란한 성취를 이루었다. 세종대왕의 성취는 세종 개인의 자질뿐 아니라 새 수도가 만들어낸 문화적 활기에도 힘입은 바 컸다. 서울 토박이가 거의 없었으니 벼슬아치는 모두 지방 출신이었다. 서울은 각 지방의 문화를 모아 새 문화로 주조하는 용광로였고, 시골뜨기들에게 출세 기회를 주는 사다리였다. ‘삼대 가는 부자 없다’는 말은 이런 ‘변화 속의 활기’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울 땅에도 ‘사람의 기운’이 들러붙기 시작했으니,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 자체가 장소에 들러붙은 ‘파당’을 의미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서울 땅에 들러붙은 ‘사람의 기운’을 털어내는 구실도 했다. 전란 이후 서울에 새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중흥의 군주’가 나올 수 있는 문화적 활기를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나라가 안정되자 다시 기득권의 구조물과 네트워크들이 서울 한 귀퉁이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정조의 화성 건설에는 이를 흔들어보려는 뜻도 담겨 있다. 정조의 개혁은 실패했고, 그 뒤로 비공식 권력이 공식 권력을 지배하는 긴 시대가 이어졌다.
역사 교과서에 권문세족이니 세도가문이니 경화벌열(京華閥閱·조선 후기 한양의 유력 가문)이니 하는 단어가 나오면 단원의 끝이 가깝다는 사실은 중학생도 안다. ‘경향 분리’, 다른 말로 ‘지방 차별’의 시대를 100년 가까이 겪은 뒤인 1894년, 시골 농민들은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 있고 돈 있는 것들을 다 쳐 없애자(驅兵入京 盡滅權貴)”며 봉기했다.
지난 반세기, ‘한강의 기적’은 서울 토박이들이 이룬 게 아니다. 서울에 새로 들어와 기회를 찾고 만들고 얻은 시골뜨기들의 성취였다. 그러니 지금 문제는 세종시가 아니라 서울이다. 서울 곳곳에 들러붙기 시작한 ‘사람의 기운’을 걷어내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서울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도 그 한 방편이다. 행정 기능 이전이 빠른 효과를 내기는 하겠지만 경제 교육 기능을 더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서울의 무게를 더는 것이야말로 나라 전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백년지대계’에 속하는 문제이다.
충남 연기군에 만드는 새 도시 이름을 세종시로 정한 것은 서울 세종로에 있는 행정 기능의 이전을 전제로 한 것이다. 행정 부처를 이전하지 않을 바에는 이름도 바꿔야 한다.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의 호에서 딴 남산 소파길은 그곳에 있던 어린이회관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의미의 근거를 잃은 이름은 생뚱맞을 뿐이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