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시대정신이 만든 역사,뒤집어 바라보면… ‘만들어진 조선의 영웅들’
입력 2010-01-07 17:29
만들어진 조선의 영웅들/이희근/평사리
역사 뒤에 감추어진 의미를 해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온 사학자 이희근 박사는 흔히 의적으로 알고 있는 임꺽정이 한낱 도적에 불과하다고 선을 긋는다. 임꺽정을 의적이 아닌 단순한 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에 충실한 해석이다. ‘명종실록’은 “도적들(임꺽정 무리)이 해주에서 평산 지방으로 들어가 대낮에 민가 30여 곳을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살해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모든 기록은 임꺽정을 의적이 아닌 도둑으로 기록하고 있다. 양반의 기록뿐만이 아니다. 의병장 조헌은 임진왜란 발생 3년 전인 선조 22년 올린 상소에서 임꺽정 사건을 거론하며 “…그 우두머리에게는 반드시 깊은 계책이 있는 것으로서 평민을 해치는 임꺽정과는 다른 자입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그가 탐관오리를 살해하고 관아를 습격해 감옥을 부수는 등의 일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행동은 폭정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임꺽정의 행동을 미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홍명희는 소설에서 마침내 임꺽정을 의적으로 둔갑시킨다. 사회주의자인 홍명희는 당시 식민지 체제의 모순을 폭로하는 수단으로 임꺽정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프랑스 혁명처럼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행동이면 모르겠지만 단순히 도둑질의 대상이 국가기관이었다고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순 없다”고 임꺽정을 의적화 하는 것을 경계했다.
홍길동도 마찬가지다. ‘연산군일기’에서는 홍길동을 강도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도 밤에 몰래 활동하는 강도가 아니라 정3품 무관직 행세를 하는 간 큰 강도였다. 심지어 경상도 동래 현령을 지낸 당상관 엄기손을 매수해 비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허균의 ‘홍길동전’을 계기로 그의 이미지는 정반대로 변한다. 부패한 정치에 실망한 백성은 홍길동을 의적으로 형상화시켜 대리만족을 얻었다. 허균은 여기에 서얼의 한을 풀어줄 인물로 홍길동을 덧씌운다. 이후 백성들은 홍길동에 대한 이야기를 재가공하며 점차 영웅화 시킨다.
하지만 홍길동 역시 백성들의 메시아가 될 수는 없다. 소설 속 홍길동은 조선 왕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이고 있고, 조선 왕조의 지배 이념인 유교적 가치를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농민반란을 주도한 혁명가로 평가받는 홍경래와 전봉준에 대해서도 다른 평가를 한다. 홍경래는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정씨 왕조가 흥기한다는 유언비어를 이용해 새 왕조를 세우고 권력을 장악할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전봉준은 당시 다른 동학군과 달리 군주인 고종에 변함없는 충성을 표하면서 주변 권력자만 제거하면 세상이 안정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렇듯 역사기록의 대부분이 당대 시대 정신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점에 착안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대한 뒤집어보기를 시도하는 저자의 상상력이 흥미롭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