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독일인들은 왜 열광했나? 균형잡힌 시각서 시대를 해부하다… ‘히틀러’
입력 2010-01-07 17:25
히틀러/이언 커쇼 지음·이희재 옮김/교양인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20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도 첫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악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가 이끈 나치 제3제국이 일으킨 광기의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게으른 반항아였고, 내세울 것 없는 실패한 예술가 지망생에 불과했던 히틀러가 어떻게 독일의 절대 권력을 거머쥔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성직자 외교관 법학자 등 당시 독일의 엘리트들까지도 왜 히틀러에게 열광해 무자비한 인종 학살의 동조자가 되었을까.
영국 세필드 대학의 현대사 교수이자 구조주의 역사학자인 저자는 30여년에 걸친 히틀러와 제3제국 연구 성과를 종합해 펴낸 히틀러 전기에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엄청난 자료를 바탕으로 히틀러와 나치 체제를 분석한 전기 ‘히틀러’는 방대함과 치밀함으로 세계 역사학계에 센세이셔널을 일으켰다. 이언 커쇼의 ‘히틀러’는 지금까지 나온 히틀러 연구서 가운데 가장 치밀하고,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저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최고의 역사 저작에 수여하는 울프슨 역사상을 수상했다. 3년의 번역과 6개월의 편집을 거쳐 완성된 한국어판은 1·2권을 합쳐 2236쪽이나 되는 대작이다.
‘히틀러Ⅰ-의지 1889∼1936’(1004쪽)는 히틀러의 출생부터 시작해 1933년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고, 36년 라인란트 점령을 계기로 팽창야욕을 드러내던 시기를 다룬다. ‘히틀러Ⅱ-몰락 1936∼1945’(1232쪽)은 제3제국이 광기의 전쟁으로 떠밀려 가고, 전쟁 막바지인 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기까지의 과정을 총제적으로 해부한다.
히틀러의 생애를 쫓아가는 저자의 시선은 철저히 객관적이고, 냉철하다. 히틀러를 악마화하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역사의 진행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나는 역사적 인물에 드러난 악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내가 하려는 것은 히틀러가 도대체 어떻게 한 사회를 휘어잡았기에 그 사회가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히틀러를 지지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2권 8쪽)
저자는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대학살의 원인을 히틀러 개인에게서 찾는 시도는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히틀러 시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히틀러 개인과 당시 독일 사회, 히틀러가 휘두른 권력의 성격 등을 동시에 파악해야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열광한 이유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전쟁, 혁명, 민족적 수모,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는 워낙 광범위한 독일 국민을 뒤흔들었고, 히틀러는 그런 상황을 발판으로 삼았다. (중략) 독일의 서민들이 느끼는 공포와 울분과 고정관념을 당대의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대변했다. 더 나은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심어주었다.”(1권 603쪽)
독일의 대중은 히틀러가 약속한 독일 민족의 구원과 부활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이는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일이 세계대전까지 불사하고, 유대인 인종청소라는 광기에 휩싸이며 극단으로 치달았던 근본 원인을 히틀러의 카리스마 통치와 나치 체제의 역동성에 찾았다. 그는 히틀러의 권력은 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중을 자발적으로 추종하게 만드는 ‘카리스마’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타고난 연설가이자 선동가, 조직가, 이론가였던 히틀러의 개인적인 자질과 측근들의 숭배가 맞물리면서 그의 카리스마적 지배력은 더욱 강화됐다는 것이다.
또 나치 체제의 역동성에 주목했다. 현대 국가의 관료제를 혐오한 히틀러는 통치기구를 무력화하고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절대 권력으로 치달았다고 분석했다. 급진적인 방안을 선호한 히틀러에게 측근들이 구미를 맞추면서 나치 체제는 급속히 급진화됐고, 홀로코스트는 급진화의 극단적인 사례였다.
히틀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와 나치즘이 인류에 남긴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고통과 회한으로 각인돼 있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히틀러의 유산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며 “그 유산에는 어떻게 히틀러가 가능했는지를 이해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무도 들어간다. 우리는 오직 역사를 통해서만 미래를 위해서 배울 수가 있다”고 적었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