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9) 섬유업계 최고 김교석 회장에게 동업 제안 받아
입력 2010-01-07 19:26
나는 평생 사업을 해왔지만 실은 장사를 할 만한 기질이 아니다. 계산이 빠르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친해지는 성격도 아니다. 집안에서나 주위에서 장사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낸 일도 없었다. 그러나 공군에서 제대하고 일자리를 찾던 20대 후반에 나는 ‘장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친척이었던 외삼촌께서 나와 형님에게 입버릇처럼 “너희는 남의 월급쟁이로 살 생각 말고 네 장사를 하라”고 권하셨기 때문이다. 공무원이셨던 외삼촌은 5·16 때 갑작스레 해직돼 많은 고생을 하셨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슨 장사를 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할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귀가 솔깃한 얘기를 듣게 됐다. 당시 나는 형님의 신혼집에 얹혀 살고 있었는데 형수님 친구의 남편 이야기였다.
“본래 청주에서 교사를 하던 분인데, 이번에 형님 사업을 돕겠다고 교사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지 뭐예요.”
그 말을 듣자 ‘어떤 일이기에 안정적인 교사직을 그만두고 뛰어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짜고짜 형수님께 “그분을 좀 만나게 해 주세요”라고 졸랐다.
그렇게 해서 얼마 후 김교찬이라는 분을 다방에서 만났다. 설명을 들어보니 그분 형인 김교석 회장은 섬유업계에서 이미 최고로 떠오른 사업가였다. 그분은 직접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직물을 개발해 여러 공장에 하청을 주고, 완성품을 받아 도매상들에 파는 일만 했다. 섬유산업에 무지했지만 ‘꽤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염치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저도 같이 일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니 “저도 아직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펄쩍 뛰었다. “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허드렛일이어도 좋습니다. 그냥 일만 하게 해 주세요”라고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김 회장 소유인 동대문 광장시장의 한 점포에서 일을 하게 됐다.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9시가 넘도록 일했다. 가게 청소하고 원단을 손님 차에 실어주거나 창고에 넣고 빼고 하는 일이었다. 정말 월급도 받지 못했지만 성실하게 일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가게에 나온 김 회장이 나를 불렀다. 그동안은 가게에서 만나도 목례조차 나눌 기회를 갖지 못한 터라 깜짝 놀랐다.
“그동안 보니 성실하게 일을 잘 하더군. 내가 여기 점포를 하나 더 낼 생각이 있는데, 나와 동업을 해볼 생각 있나?”
나보다 연배가 열 살 정도 위일 뿐이지만 하늘처럼 우러러 보이던 분의 제안이라 잠시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새 점포에 대해서 50대 50 지분으로 동등하게 일하자는 것이었다.
“예, 꼭 하고 싶습니다!” 당차게 대답을 했지만 문제는 50% 지분에 해당하는 돈 200만원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모아둔 자금은커녕 차비도 모자란 형편이었다.
형님과 외삼촌 등 가족들 사정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었고,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봤지만 그만한 돈을 가진 이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꼭 돈을 구하고 말리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당장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교회 아동부에 나가 교사 모임을 하고 있는데 ‘아, 저분이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되돌아보면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