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정승훈] 경기장엔 얘깃거리가 있다

입력 2010-01-06 18:58


고백부터 해야겠다. 대학에 다니던 1992년, 입장권을 사지 않은 채 잠실야구장에 들어가 경기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담을 넘거나 문이 아닌 곳으로 몰래 들어간 것은 아니다. 잠실야구장 중앙매표소 옆 외야석 입구로 당당하게 들어갔고, 내야석 가장 꼭대기쯤에 서서(경기 내내 앉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봤다. 그 게임은 아직까지도 유일무이한 호남팀과 부산·경남팀의 서울 경기였다. 해태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플레이오프 5차전 얘기다.

오후 2시 경기 입장권을 사기 위해 후배와 매표소에 줄을 선 것은 오전 10시가 되기 전이었다. 그로부터 약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앞에 선 사람이 10여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매진’이 됐다.

당장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뒤섞인 채 불만이 터져나왔다. 경상도 사투리의 아저씨가 언성을 높이면 전라도 사투리의 아주머니가 맞장구치는 식이었다. 말투는 달랐지만 주최 측이 암표상을 방치했기 때문에 매진이 됐다는 내용은 같았다. 불 같은 성격의 영호남 남도 어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출입문을 밀기 시작했다. 영호남의 힘을 한데 모으니 잠실야구장 한 귀퉁이 문은 쉽게 떨어져나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와∼’하며 몰려 들어갔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등 큰 관심을 모으는 경기가 있을 때마다 매표소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면을 장식한다. 그 경기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은 “참,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 많네. TV로 보면 느린 그림까지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데…”라며 혀를 찬다.

눈으로 볼 때 조그마한 야구공의 궤적을 쫓는 데는 TV가 낫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경기의 흐름을 보기 위해선 TV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축구든 야구든 공과 닿지 않은 선수들의 모습은 경기를 읽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장에서 보면 눈뿐만 아니라 귀로도 경기를 보고, 가슴으로도 경기를 볼 수 있다.

방학이 한창인데 자녀들을 어디로 데려가야 할까 고민하는 부모들이 있다면 경기장을 찾을 것을 권한다. 농구와 배구 경기가 한창이고 핸드볼 경기도 열린다.

해당 종목 전문가일 필요도 없다. 포털 사이트에서 팀과 감독, 선수들을 미리 검색해보고 그들의 스토리를 조금이라도 읽고 간다면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얘기는 무궁무진하다. 선수들의 땀방울, 승자의 환호, 패자를 향한 격려에 대해 들려주는 건 덤이다.

아이가 전문가라면 더 좋다. 아이들은 신나게 떠들 것이고 부모는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관중이 꽉꽉 들어차는 중요한 경기를 고를 필요도 없다. 모든 경기에는 그날 그 시간, 그 장소가 아니었다면 만들지 못했을 스토리가 있다. 선두를 경쟁하는 팀끼리의 경기라면 그 경기대로, 꼴찌를 다투는 팀 간의 경기라면 그 경기대로 의미가 있고 얘깃거리가 있다.

올해엔 다음달 시작되는 동계올림픽부터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스포츠 경기가 많다. 겨울방학 동안 직접 경기장에서 함께 소리치고 손을 흔들었던 가족이라면 해외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TV로 보면서도 충분히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스포츠는 대화에 있어 가장 좋은 얘깃거리이고, 일체감을 만들어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수단이다.

사족 한 마디 덧붙이겠다. 1992년 준플레이오프 5차전 얘기는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경기를 현장에서 보고자 하는 팬들의 열망을 보이기 위해 든 예다. 입장권 사지 않고 야구장 들어가는 방법을 안내하고자 한 게 아니다.

나는 18년 전의 야구장 뛰어들어가기를 반성하고 있으며 그 후로 수십 번 이상 꼬박꼬박 입장권을 구입해 경기를 관람하는 것으로 참회하고 있다. 야구 담당 기자를 하고 있는 지금도 취재가 아니라 응원을 위해 야구장에 갈 때는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간다.

정승훈 체육부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