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상) 교회가 희망이다] 일제시대 가난한 민초들의 ‘빛’

입력 2010-01-06 18:00


2010년은 불평등한 한일병합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00년 전 일제는 민족 말살정책으로 한민족을 절망에 빠뜨렸지만 기독교는 역사의 주체로서 사회를 변혁하고 일제의 학정 속에서 민족과 고난을 같이하며 항거했다. 당시 교회의 활약을 확인하고 2010년 교회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

“종기에 암소 배설물을 짓이긴 헝겊을 사용하고 기관지염에 모충(毛蟲)을, 정신착란증에 구더기를 이용하고 있었다.”(해링턴의 ‘God, Mammon and the Japanese’, 1944)

100년 전 조선은 불결하고 질병이 많은 나라였다. 집 대문 옆에 퇴비를 만들려고 오물과 인분을 쌓아놓고 우물가에 시궁창이 있었다. 매독과 머리부스럼, 안질, 천연두가 성행했다.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성들은 질병을 쫓아내기 위해 굿을 하는데 전국 농토 평가액의 3배에 달하는 1200만 달러를 사용했다고 한다.

부패한 집권층은 외세와 야합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서서히 제국주의 침투가 시작되면서 열강들의 각축장이 됐으며,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과 을사조약을 체결하면서 노골적으로 한국강점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이런 현실에서 백성들은 희망을 잃었다. 심지어 마약 밀매가 성행하기도 했다. 평양 기독교병원에서는 평균 35명의 아편중독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선교사들은 그 수가 1000여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헐버트 선교사의 ‘Opium in Korea’, 1906).

하지만 사회개혁의 원동력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교회는 가정윤리를 세우고 여성의 사회적 신분을 보장하는 가치를 전파했다. 또 주초금지운동을 벌이고 우상과 미신을 타파했다. 학교와 병원을 세웠으며, 고아를 구제하고 노비와 백정을 해방시키는 이념을 전파했다.

그리피스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에 직면한 지각 있는 조선 사람들은 생각과 행동하는 면에서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됐습니다. 그들 가슴 속에는 기독교가 숨어들자 그들 자신 이외에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생각하게 됐습니다.”(‘Corea the Hermit Nation’, 1907)

당시 교회는 전래된 지 30년이 되지 않았으며, 교인은 전 인구의 0.5%인 25만명에 그쳤다. 그러나 사회 변혁의 활동상은 100만의 교세를 내세운 천도교나 불교, 유교를 압도했다.

1903년의 원산부흥회와 1907년의 평양부흥회를 거치고 1909년에는 100만명 구령운동을 전개했다. 평양에선 1000명의 신자들이 전도운동을 했다.

이런 기독교의 세력 확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일제였다. 1911년 일제는 기독교인사 600명을 체포·투옥하며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국가 해체라는 상황에서 최대의 조직력을 갖고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할 잠재력을 지닌 위험인물로 기독교 지도자들을 지목한 것이다.

민경배 연세대 명예교수(한국교회사)는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을 받았다면 조선은 사회 변혁의 주체인 기독교로 주목을 끌었다”면서 “이것을 간파한 일제는 1915년 사립학교법을 만들어 차세대를 교회와 분리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신앙의 민족에너지를 막지 못했다. 이것은 결국 1919년 3·1운동으로 표출됐다”고 설명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