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돌 구르는 소리에 동백 꽃망울이 터졌네

입력 2010-01-06 17:40


거제도 '황제의 길' & '황제도 못가본 길'

‘황제의 길’이 거제도의 리아스식 해안선을 걷는다. 길은 그림 같은 해변에서 쉼표를 찍고 보석 같은 섬에서 느낌표를 만난다. 서럽도록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황제의 길’을 수놓고, 오랜 세월 닳고 닳아 동글동글한 검은 몽돌 해변에서 하얀 파도가 지휘봉을 잡는다. 흑백의 건반이 연주를 하듯 천상의 화음이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 ‘황제의 길’에 울려 퍼진다.

벚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던 1968년 5월 어느 날.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는 경남 거제도의 망치고개에서 원더풀을 외쳤다. 속삭이듯 쪽빛 바다에 올망졸망 떠있는 크고 작은 섬과 고깃배들. 황제의 왕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연륙교가 없어 거제도가 외딴섬이었던 시절. 한국전쟁 때 에티오피아군을 파견했던 인연으로 한국을 찾은 셀라시에 황제는 비공식 일정으로 거제도를 찾았다.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77세의 늙은 황제는 망치고개에서 학동몽돌해변을 거쳐 거제해금강에 이르는 해안도로를 달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6번이나 더 원더풀을 외쳤다. 훗날 이 길은 ‘황제의 길’이라는 영예를 얻는다.

셀라시에 황제가 첫 번째 원더풀을 외쳤던 망치고개는 북병산 능선을 넘는 고갯마루. 지금은 울창한 나무 때문에 바다가 잘 보이지 않지만 당시에는 쪽빛 바다에 보석처럼 흩뿌려진 외도 내도 윤돌섬 등이 풍경화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내려온 ‘황제의 길’은 망치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처음으로 바다를 벗한다. 셀라시에 황제가 두 번째로 원더풀을 외쳤음직한 곳이다. 반원형의 바다에 떠있는 윤돌섬은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빨래하는 모습. 윤돌섬에 살던 삼형제가 노모를 위해 바다에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효자섬으로도 불린다.

윤돌섬 바깥에 위치한 섬은 내도와 외도. 그 옛날 외도의 여인이 새벽에 섬이 떠내려가는 장면을 목격하고 소리를 지르자 섬이 제자리에 멈춰 내도가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남해의 거친 풍랑으로부터 내도를 보호하는 외도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 낸 예술품. 드라마 ‘겨울연가’의 마지막 장면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파라다이스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황제의 길’은 학이 날아가는 모습의 학동에서 1.2㎞ 길이의 몽돌해변을 만난다. 흑진주처럼 검은 피부의 몽돌이 깔린 학동흑진주몽돌해변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의 하나. 수백만년 동안 파도에 닳아 동글동글한 몽돌은 파도가 쓸려나갈 때마다 자그락 자그락 소리를 낸다. 황제를 위해 교향곡을 연주했던 몽돌해변. 그 선율은 이 세상 어떤 악기와 목소리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상의 화음으로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도 올랐다.

학동흑진주몽돌해변에서 서쪽으로 1㎞ 구간은 천연기념물 제233호인 학동동백림. 팔색조 도래지로도 유명한 동백림은 2000년에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마을숲으로 뽑히기도 했다. 푸른 바다를 캔버스 삼아 초록 잎과 붉은 꽃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동백은 한 폭의 그림.

‘황제의 길’은 차마고도처럼 고도를 높이다 함목삼거리에서 명승 제2호로 지정된 거제해금강으로 방향을 잡는다. 동백나무와 먼나무가 멋스런 가로수 너머로 풍차가 돌아가는 이색적인 지형은 ‘바람의 언덕’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졌다. 바닷바람이 거세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으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바람의 언덕’을 배경으로 삼았다.

길은 갈곶리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위치한 신선대 전망대에서 일망무제의 한려수도를 조망한다. 벼랑 아래의 널찍한 바위는 신선이 내려와서 풍류를 즐겼다는 신선대. 쪽빛 바다 건너 멀리 소병대도와 대병대도, 그리고 매물도가 해무 속에서 아련하다. 셀라시에 황제가 6번째 원더풀을 외쳤음직한 풍경화이다.

‘황제의 길’은 거제해금강에서 늙은 황제에게 마지막 절경을 선물한다. 바다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해금강의 이름은 갈곶도. 춘란 풍란 등 620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식물의 보고로 썰물 때 배를 타고 들어가면 천장에 뚫린 십자 모양의 구멍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갈곶도에 딸린 사자바위는 해돋이 명소.

셀라시에 황제는 아쉽게도 거제해금강에서 마지막 7번째 원더풀을 외친 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차와 홍포로 가는 해안도로가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제해금강 입구에서 다대포구와 여차몽돌해수욕장을 거쳐 홍포마을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1981년에 망산의 허리를 잘라 만든 길로 거제도가 숨겨놓은 비경 중의 비경. 도중에 만나는 다대포구는 이순신 장군의 함대 91척이 옥포대첩을 하루 앞두고 정박했던 포구이다.

황제도 달려보지 못한 여차∼홍포 전망도로는 거제도를 에두르는 386.74㎞의 해안선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을 벗한다.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역이라 포장조차 하지 않은 도로는 망산 자락을 돌고 오르내릴 때마다 작은 섬들과 숨바꼭질을 한다.

대병대도 소병대도 등가도 대매물도 소매물도 어유도 국도 가익도 가왕도 등 20여개의 섬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은 망산 자락에 위치한 홍포전망대. 이곳에 서면 거제와 통영의 섬은 물론 맑은 날에는 멀리 남쪽 수평선에 걸린 대마도도 선명하게 보인다.

홍포전망대에서 보는 섬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화의 주인공. 이른 아침 수평선에서 해가 솟으면 작은 섬들은 동백꽃처럼 빨갛게 빛난다. 안개와 구름이 작은 섬들의 허리를 휘감는 신비도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 무지개가 자주 나타나 무지개포로 불리는 홍포는 해돋이와 해넘이의 명소로 해가 수평선과 입맞춤을 하는 순간 노을이 가장 붉고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졌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셀라시에 황제의 감탄사로 인해 유명해진 ‘황제의 길’과 황제가 걷지 못해 더 유명해진 홍포 가는 길. 먼지가 풀풀 날리는 그 길은 쉼표와 느낌표가 그려진 오선지처럼 망산 자락을 에두른다.

거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