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신의 깜짝 한수] 여자상비군리그전 ● L 4단 ○ K 3단
입력 2010-01-06 21:26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 도로엔 몇 대 안되는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고 전철도 평소보다 느리다. 그렇지만 이런 날은 모든 것이 다 용서 될 것만 같은 기분에 마냥 착해지고 있다. 지각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빨리 뛰어가야 하지만 변해 버린 세상에 만사 다 제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2010년 새해 첫 출근길. 일반 직장인들이 시무식을 하듯 한국기원 직원들도 시무식을 했다. 하지만 프로기사에게는 시무식이 따로 없다. 기사에게 시무식이란 아마도 새해 첫 시합이다.
지난번에 소개했듯이 여자 기사들이 모여 바둑을 두고 공부를 한다. 상비군이라는 이름으로. 하얀 눈이 아름답게 세상을 덮어버린 날. 여자 기사들도 눈 내리는 그날 모여 바둑에 대한 열정으로 한국기원을 덮었다.
이번 리그에서 나온 아차 실수를 흑 백 모두 사이좋게 주고받은 수순을 소개할까 한다. 대국자가 소개되어지길 꺼려 이니셜로만 표기한다. 두 기사 모두 초읽기에 들어가 볼이 발갛게 상기되고 있다. 형세 판단을 정확히 하지 못한 흑은 단번에 승부를 보기 위해 좌상귀에 수를 내러 실전 흑1로 들여다봤다. 흑5까지 필연의 수순이 진행되고 이 때 백6으로 받았는데 이 수가 대실착이었다(흑은 흑1에 두자마자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지만 이미 손에서 돌이 떨어져 나갔는데 어쩌랴).
참고도의 백1로 받았으면 아무 수도 나지 않는다. 흑2로 막을 때 백3으로 중앙 한 점을 잡아 귀에선 아무 수도 나지 않아 흑이 잔뜩 보태준 꼴이다. 참고도와 실전은 자충의 차이가 있다. 실전 백6은 최악의 형태로 흑7을 선수하고 흑13까지 살아버려 백은 껍데기만 남게 되어 승부 끝. 참고도의 백1은 알고 나면 쉽지만 그렇다고 이 장면에선 이 한 수밖엔 되는 수가 없다. 이렇게 귀의 형태는 프로기사도 늘 헷갈리는 곳이다. 평상시에 꾸준히 집중해서 수 읽는 훈련을 하는 수밖엔 방법이 없다.
수가 되지 않는 곳에 수를 내러 간 흑도 잘못이고 그 수를 응징하지 못한 백도 잘못이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묘하게도 실수가 들어 먹히면 평범한 수보다 더 큰 득을 보게 되어 한 번씩 그 꼼수를 두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 때가 있다. 물론 ‘평범이 곧 비범’이라는 진리를 알고는 있지만 어쩌겠는가. 유혹에 약한 인간인 것을. 독자 여러분, 폭설처럼 좋은 일들 폭격 받으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로 4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