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피플-한전 변준연 해외사업본부장] “KEDO 경험이 UAE 원전 수주 밑거름”

입력 2010-01-05 17:26


지난달 28일 오후 6시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1층.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전 수주를 성공으로 이끈 김쌍수 한전 사장 일행이 로비에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 500여명은 환호성과 함께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김 사장은 “대한민국의 승리이자 우리의 승리”라고 답례하면서 뒤에 서 있던 한 사람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표했다.

한전 해외사업본부장인 변준연(55) 전무였다. 변 전무는 UAE를 17차례나 오가며 긴박했던 원전 수주전을 현장에서 총지휘한 ‘야전사령관’이자 ‘플레잉 코치’였다. 1977년 한전에 입사한 이래 국내 원전 수주 업무부터 해외 원전 프로젝트 참여에 이르기까지 반평생 넘게 원전에 ‘올인’해 온 그였다.

5일 삼성동 한전 본사에서 만난 변 전무 표정에는 ‘승자의 추억’이 묻어났다. 지난해 2월 7일 UAE 아부다비에 위치한 7성급 에미리트 팰리스 호텔. UAE 원전수주를 위한 입찰 설명회 마지막 날이었다. 한국 대표로 참석한 변 전무는 암담했다.

“20개국 가운데 우리(한전 컨소시엄)가 수주에 성공할 확률은 5%가 채 안되더라고요.” 설상가상으로 해외 유력업체들은 현대건설이나 두산중공업, 한국수력원자력 등 한전컨소시엄으로 참여하는 국내 업체들을 떼어달라고 요구해왔다. 변 전무는 단번에 “노(No)”라고 말했다. 33년간 국내외 원전 파트 업무를 맡아오면서 이루지 못한 일 한 가지가 바로 원전 수출이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을(乙)이 되자.’ 변 전무가 지난 1년 동안 이끌어온 수주팀의 핵심 업무 기조다. “갑은 선택하고 을은 선택받는 자입니다. ‘어떻게 하면 갑에게 선택받을 수 있을까’에 모든 역량을 모았죠.”

이 과정에서 그가 과거 몸담았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서의 업무 경험은 수주전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KEDO사업은 1994년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핵합의에 따라 북한이 핵을 동결하는 대신 한국과 미·일·유럽연합(EU)이 북한에 1000㎿급 경수로 2기를 건설해주는 사업이다. 그러나 2002년 불거진 2차 핵위기로 중단됐다.

“KEDO 업무는 모든 자료가 영어로 이뤄졌거든요. 각종 협상 자료나 제안서 등 수천 가지 문서가 필요한데, 그때 준비해 놓은 각종 매뉴얼과 당시 업무에 참여한 30여명의 인재들이 이번 수주에서 위력을 발휘한 거죠. 1조원이나 투입된 KEDO 사업이 중단돼서 몹시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47조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열매를 맺는 밑거름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번은 세계 최고의 원전 전문가 75명으로 구성된 UAE 원자력공사(ENEC) 실사단이 직접 한전을 찾은 일이 있다. “영어권 국가도 아닌데 각종 제안서와 보고서를 이렇게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서 직접 봐야겠다”는 게 방문 목적이었다.

아부다비 현지에서 열린 수차례 설명회에서는 2억원을 들여 제작한 10분짜리 비디오 영상이 대박을 터뜨렸다 “아부다비 허허벌판에 원전 4기를 만들었을 때 아부다비가 이렇게 바뀐다는 내용을 3차원 입체 영상으로 보여줬어요. 발주처 관계자들이 감탄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고요.” 갑의 입맛에 철저히 맞춰 내놓은 ‘맞춤형’ 수주 전략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최대 경쟁 상대인 프랑스(아레바)의 치밀한 로비전에 가슴 졸인 적도 여러 차례.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어선 안 될 절체절명의 순간도 부지기수였다. 변 전무는 그때마다 팀원들에게 ‘주사위 사고방식’을 일깨웠다.

“숫자 1은 우리(한전)입니다. 반대편(6)에는 발주자가 있고요. 옆면(2)에는 경쟁사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 맞은편(5)에 우리 협력업체들이 있지요. 또 다른 면(3)에는 우리 정부가 있고, 반대편(4)에도 경쟁국 정부가 있다는 걸 잊지 맙시다.” 변 전무는 자문했다. “철저한 을의 입장이 아니라면, 절박한 을의 마음이 아니었다면 수주전에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