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찾는 사람들-(2) 루게릭병 앓는 이원규 시인] 육신은 굳었지만… 눈부신 새해를 노래하다
입력 2010-01-04 19:40
“새해가 밝았다/거듭거듭 새로 태어나라고/들판 가득 따스한 햇살을 흩뿌리며/마침내 새날이 왔다.”
병마에 육신이 굳어버린 시인은 새해를 오히려 아름답고 눈부시다고 노래했다. 근위축성측색경화증(루게릭병)을 11년째 앓고 있는 이원규(50)씨는 바짝 마른 몸으로 ‘희망’을 말했다.
지난 1일 서울 신천동 이씨의 자택. 아내 이희엽(47)씨가 의자에 앉힌 남편을 거실로 밀고 나왔다. 바퀴 달린 의자였다. 사지를 아래로 늘어뜨린 이씨는 뼈만 남도록 말라 있었다. 키 172㎝, 몸무게 45㎏. 그는 한때 70㎏까지 나갔다고 했다. 병에 잠식당한 사이 25㎏을 잃었다.
이씨는 웃으며 기자를 맞았다. 그는 얼굴 일부 근육과 두 눈, 왼쪽 엄지발가락만 움직일 수 있다. 루게릭병은 온몸이 말라붙다 한줌으로 돌아가는 병이다. 몸에서 운동세포가 증발해 근육이 오그라들고 전신이 차례로 마비되다 결국 숨이 끊어진다. 발병 원인과 치료법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이씨는 혀가 굳어 직접 말할 수 없다. 신음하듯 소리를 내면 아내가 알아듣고 대신 전달한다. 아내는 거의 모든 말을 알아들었다. 생소한 단어가 나오면 한글 자모음과 숫자가 적힌 판 위에서 단어를 조합한다. 이씨는 병세가 입에서 시작해 사지로 뻗어나간 탓에 언어장애를 가장 먼저 겪었다.
루게릭병에 걸리면 발병 후 2∼3년, 길어야 5년 안에 죽지만 이씨는 만 10년을 버텼다. 그는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1999년 1월 코가 막히고 목구멍이 답답해 동네 의원을 찾았다. 아내는 “그해 8월 서울대병원에서 루게릭병 진단을 받을 땐 곧 죽을 거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씨가 건넨 시 ‘새해의 노래’에는 새해를 맞는 벅찬 심정이 실렸다. “새것은 아름답다/새것은 눈부시다/아름답고 눈부신 것은 나를 설레게 한다.” 그는 시에서 “새해 앞에 서 있는 나는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씨는 93년 두 편의 시, ‘매미’와 ‘강물이 어두워져’로 등단했다.
이씨는 올 가을 첫 시집을 낼 계획이다. 그가 미리 정한 시집 제목은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다. “가슴에 품은 첫사랑이라면 아내는 아닐 듯한데….” 넌지시 떠보자 이씨는 “누구나 지나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 않으냐. 그걸 첫사랑에 빗댄 것일 뿐 정작 첫사랑에 대한 시는 없다”고 했다.
이씨의 희망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 그는 이 일념으로 병세가 한창인 2004년 국문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11월 열린 서울시 보조공학서비스센터 발전방향 세미나에서는 아내 도움 없이 발표를 마쳤다. 엄지발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단어를 입력하면 문장을 그대로 읽어주는 장치를 활용했다. 이씨는 강단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여기서 확인했다고 했다. 몇몇 대학 관계자로부터 “의지만 있으면 자리는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도 들었다.
이씨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고 했다. “병에 걸린 뒤에야 저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훌륭하게 이겨내는 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반드시 건강을 회복해 루게릭병은 결코 불치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