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조용래] 한·일 관계 새로운 100년을 맞다

입력 2010-01-04 16:49


"한·일 초·중·고교 사회과교사 상호 방문프로그램을 통해 지속적으로 서로를 배우고 익히도록 하자"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은 처음으로 300만명을 돌파했고 양국을 오간 방문객은 450만명에 이른다. 원저·엔고 영향으로 일본인 방한이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양국의 인적 교류 확대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주창한 ‘21세기 한·일 신시대 선언’에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일본 대중문화를 단계적으로 허용했고 일본 내에서도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 등이 큰 인기를 누리게 됐다. 이른바 한류(韓流) 붐의 시작이다.

요즘 한류 붐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일부 있다. 하지만 특정 상품에 대해 충성도가 높고 어떤 한 가지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일본인들의 마니아(mania) 성향을 감안할 때 한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최근 한국 젊은이들에게서도 확인된다. 일본식으로 먹고 입고 놀자는 이른바 재팬 필(Japan Feel)이나 일본 대중문화에 깊이 심취하는 일본 마니아들이다. 지난해 말 화제가 됐던 드라마 ‘아이리스’가 일본 아키타현에서 촬영을 했다 하여 현지에 한국인들이 쇄도하고 있다.

이제 양국의 상호 문화상품 소비는 탈정치·탈역사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예컨대 2001년부터 6년 연속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했던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의 행보로 양국은 정치외교적으로 큰 갈등에 휩싸였지만 그 기간 중 양국민의 상호방문이나 문화교류는 줄어들지 않았다.

양국의 탈정치·탈역사적 문화소비 행태는 바람직한 듯 보인다. 한국을 아예 부인하는 혐한(嫌韓)이나 뿌리 깊은 불신에서 빚어지는 반일(反日)이 여전히 적지 않은 가운데 양국 관계가 새로운 차원에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지난 100년의 아픔, 일본과 한국의 질곡의 역사, 지배와 피지배의 갈등이 해소된다는 보장은 없다. 더구나 나날이 늘어가는 한국 내 재팬 마니아와 한류 붐을 타는 일본 아줌마들은 갈등과 대립의 과거보다 현재의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역사보다 드라마적인 현실에 더 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양국 문화소비자들의 보편적인 행보를 폄하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양국 간의 친밀감을 높여주고 있는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 돌아보면서 배려하고 공존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억압의 역사와 공존의 미래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학습과정을 양국 사이에 마련할 수 있다면 한·일 관계는 어쩌면 새로운 100년을 맞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학습이라고 하면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이해하는 데에는 현장 경험을 통한 느낌을 포함하여 학습만큼 분명한 것은 없다.

모르면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기 어렵고 배우지 않고서는 상대의 아픔과 문화의 진수를 바로 공감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 양국의 초·중·고교 사회과목(역사 포함)을 담당하는 교사들이 방학기간 중에 상호 방문하여 지속적으로 배우고 느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단계별로 상호방문학습의 내용을 심화시킬 수 있도록 한다면 방향성은 바로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한·일 사회과교사 상호방문학습 프로그램’(가칭)을 만들자. 참여 교사가 배우고 느낀 내용들은 고스란히 양국의 초중고생들에게 전해진다면 앞으로 양국 교류의 중심이 될 학생들의 상호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프로그램을 누가 조직하고 재원조달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양국의 시민사회가 직접 연대하여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초기 단계에서는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할 것이므로 양국 정부가 상호 매칭 펀드를 마련해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보조하되 관리운영은 민간단체에게 맡기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해빙을 맞은 한·일 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자면 논의를 지금부터 치밀하게 이어가야 한다. 올 한 해는 지나간 100년과 새로 올 100년을 위해 한·일 시민그룹이 힘을 합하여 성과를 얻어내면 좋겠다. 한·일 관계의 새로운 100년은 동아시아 공존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