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 바로 세우자-(4) 출판사·집필자마다 다른 교과서] 역사를 문화관점으로 보라
입력 2010-01-03 19:28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다. 중·고교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얻고 또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교과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한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가치관과 사회·역사의식을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초·중·고 역사(사회) 교과서가 중요하다. 굴절된 가치관과 왜곡된 역사관을 갖는다면 우리나라의 내일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는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事實), 즉 과거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입각해 바르게 서술돼야 한다. 치우침 없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중·고교에서 사용되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살펴보니 기독교 관련 내용이 출판사와 집필자의 입장에 따라 차이가 난다. 몇몇 교과서에는 좀 심하다고 느낄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 왜곡, 축소 기술됐다. 근대 교육과 관련된 부분을 예로 살펴보자.
모 출판사의 교과서는 “우리나라의 개항 이후… 개화 관리와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근대 학교를 세웠고 정부도 교육을 개혁하고자… 근대적 학교인 육영공원을 설립하였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맨 뒤에 가서 “이 밖에 기독교계 종교 단체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그 대표적인 학교였다”고 서술했다.
이 교과서는 우리나라의 근대 교육이 민간 차원에서 먼저 시작되었음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정부의 교육개혁은 그 뒤를 따라갔으며, 또한 “유교를 국민 교육의 근간으로 삼았다”는 점을 내세웠다. 이러한 서술은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우리 토양에서 자생적으로 발아(發芽)해 스스로 자라나고 발전했음을 은연중에 주장하는 것이다. 그동안 일반 역사학계는 이 같은 논리를 폭넓게 인정해왔다. 문제는 이 주장에 다음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개항(1876년) 이후 전개된 근대화가 과연 다른 나라(서양)의 영향과 개입 없이 독자적으로 이뤄졌는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개항 이후 우리의 근대화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에서 서양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전개됐다. 1882년 조선 정부가 미국과 외교관계를 체결하고(조미조약), 급진 개화파인 김옥균이 일본에서 미국 기독교(개신교) 선교사들과 접촉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타진하였는데, 이는 이들을 통해 근대화가 효과적으로 추진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를 사귄 재일(在日) 미국 선교사 녹스는 본국 선교본부에 조선 선교에 나설 것을 설득하려 했다.
이 무렵에 조선 정부가 미국으로 견미사절단을 파송했다. 방문단 일행이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대학 총장이자 감리교회 목사인 존 가우처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가우처 목사는 속히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재일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가 김옥균과 가까이 지낸다는 점을 알고 그를 통해 조선 왕실과 접촉케 했다. 매클레이 선교사는 1884년 6월 조선으로 건너와 국왕인 고종을 만나 그로부터 학교 및 병원 사업에 대한 윤허를 받아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고종의 입장이다. 그는 조선의 국왕으로서 근대화를 위해 서양 선교사의 입국을 허락했다. 1885년 첫 미국 선교사 6명은 이러한 환경 때문에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도 분명해졌다. 즉, 교육과 의료 부문으로 한정됐다. 공개적인 포교(선교)는 금지됐다. 헨리 아펜젤러가 그 해 학교를 설립했고, 이듬해에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여성교육기관을 세웠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도 학교를 세웠다. 그들이 설립한 학교 이름을 고종과 명성황후가 손수 지어줬다. 고종은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 이름을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명성황후는 첫 여학교 이름을 ‘이화(梨花)’로 지었다. 이렇게 국왕과 황후가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이름을 친히 지어 준 까닭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유추해 보건대 당시 정부는 서양문명을 주체적으로 수용해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의 입국과 제한적 활동이 필요했다. 따라서 현재 어느 근현대사 교과서에 기록된 “한국의 근대사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지키려는 민족운동의 역사”라는 것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역사를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치우쳐 돌아보게 한다.
꼭 서술해야 할 역사적 사실조차 빠트리게 한다. 19세기 후반 이후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세계 문명이 소통하고 교류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물론 거기에 수반된 힘의 논리를 살피면서 ‘열린 마음과 대화하는 자세’로 살펴야 할 테마다. 이제 역사를 정치와 이념의 관점에서 탈피해 문화적 관점으로 읽어야 할 때이다.
임희국 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