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길-한기호] 아버지의 편지
입력 2009-11-17 20:30
지난 4일 열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출간 30주년 축하모임에 다녀왔다. 신종 플루가 기승을 부리고 있음에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 책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과 제자, 그리고 지인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놓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상 깊게 읽었다.
조선시대에 양반에게 독서는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책을 읽어 과거라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인간으로 대접받고 족보에도 오를 수 있었으니 책은 권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다산이 귀양지에서 18년을 보내는 바람에 그의 두 아들은 과거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매우 쓰라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두 아들에게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밖에 없다”는 편지를 쓰고, “중간에 재난을 만난 너희들 같은 젊은이들만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역설한다.
다산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일일이 충고하고 있다. “경학(經學)공부를 하여 밑바탕을 다진 후에 옛날의 역사책을 섭렵하여 옛 정치의 득실과 잘 다스려진 이유와 어지러웠던 이유 등의 근원을 캐보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 즉 실학에 마음을 두고 옛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했던 글들을 즐겨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이런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잘 담겨 있기에 30년 동안 꾸준히 팔리고 있을 것이다. 축하 모임에 참석하면서 나는 아버지가 아들딸에게 보낸 편지가 베스트셀러가 된 경우를 떠올려 보았다.
인도 민족해방투쟁의 지도자인 네루가 6번째로 투옥되었을 때 13살의 딸 인디라 간디는 혼자 남겨졌다. 이때 아버지는 약 3년 동안 196회나 편지를 썼다. 자신들이 왜 헤어져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약소민족도 세계사에서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하기에 ‘세계사적인 이별’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그 편지들은 우리를 서구 중심의 편협한 세계역사에서 벗어나도록 안내한다. 이 편지를 읽고 자란 인디라 간디가 인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는 것과 이 편지를 모은 책 '세계사 편력'이 한때 젊은이들에게 필독서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문필가인 필립 체스터필드(1694∼1773)는 유럽에서 공부 중이던 16살 아들에게 앞으로 2년 정도의 시간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며 자신이 경험으로 터득한 실제적인 지혜를 편지로 써 보냈다. 그 편지 또한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자기계발서가 되었다.
1987년에 미국 AP통신 시애틀지국에서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던 패트릭 코널리는 새벽에 출근했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아침마다 두 아들에게 시, 수수께끼, 생활철학 등 갖가지 내용에다 네 식구와 애견을 등장인물로 한 삽화까지 곁들여 재미있고 다채롭게 꾸민 짧은 편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그 편지들은 아버지가 아이들을 위해 차린 마음의 식탁이자 영양식이었다. 코널리는 41세의 나이로 심장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 편지는 '사랑하는 아빠가'라는 책으로 나와 독자를 감동하게 만들었다.
자식과 함께 생활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애틋하다. 진실을 위해서 싸우다 몇 차례나 투옥당한 한 학자가 막상 자신의 딸이 투옥되자 너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사실상 ‘공부’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런 자식들에게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