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광주 변두리,기찻길 옆의 셋집에서 어머니는 나를 배어 낳았다.십일월이 끝나가던 즈음의 오전이었다.아버지는 철길 옆 둑방에 내 태를 묻었다고 했다.세 살이 되기 전에 그 동네를 떠났으므로 나에게는 그 집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중흥동의 한옥집이 나에게 기억되는 최초의 공간이다.자그마한 포도 넝쿨과 동백나무가 심어진 그 집 마당에서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와 계몽사 문고,이원수 마해송 권정생의 동화들을 읽었다”소설가 한강씨(32)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소개한 약력이다.아버지 한승원씨(63)의 뒤를 쫓아 나란히 작가의 길을 가고 있는 부녀가 이번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화책을 동시에 펴냈다.
‘우주 색칠하기’(한승원)와 ‘내 이름은 태양꽃’(한강).아버지는 지난 1999년 펴낸 ‘어린 별’에 이어 두번 째고 한강씨로써는 첫 동화책이다.“아버지와 제가 동시에 동화책을 낸 것은 우연한 일인데도 무슨 이벤트처럼 받아들여질까봐 얼굴이 화끈거립니다”고 말한 강씨는 이제 두돌박이 아들 ‘새벽’(애칭)의 엄마이기도 하다.강씨는 아이를 가졌을 때 건강이 좋지 않아 무던히도 병치레를 해야했단다.그 때마다 작은 존재들의 살아있음에 용기를 얻었던 그가 기억을 되살려 쓴 것이 이 동화로 보잘 것 없는 풀 한 포기가 태양보다 밝고 빛보다 환한 꽃으로 성장하기 위해 치러내야 했던 독한 가슴앓이를 통해 생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내가 얼른 자라지 못하는 건 이슬 때문이 아니란 걸요.태어날 때부터 이미 나는 담쟁이처럼 빨리 자라는 줄기도,힘차게 땅을 짚는 갈고리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
‘나’는 담장 이편에 남아 있는 담쟁이의 긴 다리를 쓸쓸히 내려다본다.‘나’는 “담쟁이의 눈과 귀는 지금쯤 얼마나 먼 데까지 뻗어갔을까”를 생각하며 빨리 자라지 않는 자신의 키를 원망한다.‘나’는 자신의 발목 근처에는 비가 내려도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죽고만 풀의 흔적을 보며 울음을 그친다.비바람에 목을 떨군 장미나 봉숭아 맨드라미도 이젠 부럽지 않다.‘나’는 깨닫는다.“내 이름은 언제나 태양꽃이란 걸요”
지난해 가을,곁에 누워 방실방실 웃고 있는 새벽이의 두 눈을 들여다 보며 글을 썼다는 그는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손끝에 담아 자판기를 두드렸다.바로 그 즈음,전남 장흥에 살고 있는 새벽이의 외할아버지 한승원씨도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한 여교사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반에 손거울을 가지고 다니는 학생이 있어요.처음엔 여자아이들 치마 속을 비추는 짖궂은 장난꾸러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학생의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마당가의 치자나무에 꽃이 피면 체경을 내다가 앞에 세워두곤 했답니다.소년은 할머니의 유품이 된 콤팩트에서 거울을 떼어내 꽃의 얼굴을 비추는 습관이 생긴 것이죠”
한씨는 여교사가 소년에게 “이 우주라는 것은 말이여,반드시 너 같은 놈의 가슴 색깔로 색칠해야 하는 거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며 ‘우주 색칠하기’라는 동화를 써내려갔다.동화는 다도해를 배경으로 순수를 상징하는 별공주와 빛을 상징하는 꼬리별나라 왕자,그리고 어둠을 상징하는 어둠나라 왕자를 축으로한 토막글로 연결된다.그 중의 한 대목.“그대들은 그동안 서로를 사랑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는 서로 멀리 떨어져서 외로워하고 슬퍼하면서 그리워할 필요가 있습니다.내가 진실로 상대를 사랑하는지,냉정하게 자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그리움과 외로움과 슬픔의 눈으로 세상을 살핀 결과는 보석같은 앙금일 수 있습니다”
늙은 자라가 별공주에게 들려주는 이 대목은 한승원씨가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자 서울에 살고 있는 딸에게 하고 싶은 말로도 들린다.이쯤에서 장흥 앞바다를 바라보며 사는 아버지와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 둥지를 튼 딸 사이의 거리감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만다.새벽이도 머지않아 외할아버지와 엄마가 쓴 동화를 읽게 될 것이다.동화가 수 세대에 걸친 아름다운 매개체이자 시간의 교감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철훈기자
3대를 이어주는 ‘내리사랑 동화’…한승원―한강 父女 동시 동화책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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