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묘 앞 세운상가는 ‘세계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란 뜻의 야심찬 작명 아래 1960년대 들어섰다. 전쟁 후 형성된 판자촌과 사창가를 ‘나비 작전’(성매매 남성을 나비에 빗댄 단속 정책)과 함께 철거한 뒤 종로에서 퇴계로에 이르는 길쭉한 상가군을 세웠다. 당대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 테이프를 끊은 국내 첫 주상복합단지였지만, 기운이 모이다 말았는지 서울의 변천 속에서 시간이 갈수록 기구한 운명에 휘말렸다.
1970년대 유명인이 꽤 살던 주거 기능은 강남 등지에 아파트가 대거 들어서며 소멸했고, 전자제품 집결지였던 상권 기능은 1987년 등장한 용산전자상가에 빼앗겨 낙후해 갔다. 종묘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자 나왔던 전면 공원화 계획, 도심 공동화를 막자던 260층 랜드마크 건설 계획 등 1990년대 세운상가를 둘러싼 여러 구상은 청사진을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서야 재개발 논의가 본격화했는데, 개발과 보존, 도시를 대하는 상반된 철학이 충돌했다.
2008년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운상가와 주변 블록을 다 허무는 정비계획을 발표했다. 주변 개발 수익으로 세운상가 부지에 종묘~남산 녹지축을 조성하는 구상은 일부 철거까지 진행됐지만, 박원순 시장이 백지화해 ‘다시·세운’이란 도시 재생 사업으로 바꿨고, 이에 따라 세운상가를 그냥 놔둔 채 설치된 공중보행로는 다시 오 시장이 취임해 녹지축 계획을 재추진하며 철거키로 결정됐다.
개발→보존→개발로 뒤바뀌어온 사업이 이번엔 종묘 경관 보존론에 부닥쳤다. 개발로 들어설 건물이 너무 높아 종묘의 가치를 훼손한다며 국무총리까지 제동을 걸고 나섰다. 보수 시장의 역점 사업을 진보 정부 인사들이 막아선 형국은 내년 지방선거의 전초전 성격을 띤다. 철학의 다름이 문제라면 접점이 있을 텐데, 정치적 진영의 충돌로 비화하고 있다. 도시와 문화재, 굳이 정치적이지 않아도 될 사안마저 진영 논리가 좌우한다면 어떤 사회적 합의가 가능할까. 도시의 흉물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태원준 논설위원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