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정치국 최고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하마스가 31일(현지시간) 밝혔다. 이스라엘군이 골란고원 축구장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공습, 헤즈볼라 수장의 오른팔을 사살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하마스 1인자가 이란 심장부에서 피살된 것이다. 중동 정세가 급격히 요동치는 가운데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확전이 불가피한 것만은 아니다”며 외교적 해결을 호소했지만, 이란 최고지도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강력한 보복을 지시했다.
하마스는 이날 텔레그램 성명에서 “하니예가 테헤란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아 살해됐다”고 밝혔다. 이란혁명수비대도 성명을 내고 “하니예가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뒤 테헤란 숙소에서 이스라엘의 급습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가 운영하는 누르뉴스는 “하니예의 숙소가 31일 새벽 2시쯤 발사체(미사일) 공격을 받았다”며 “숙소는 테헤란 북부에 있는 참전용사용 특별주택”이라고 전했다.
하니예는 지난 30일 테헤란 마즐리스(의회)에서 열린 페제시키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취임식에서 하니예는 페제시키안 대통령과 포옹하고 손을 맞잡아 들어 올리는 등 우호 관계를 과시했다. 취임식에는 헤즈볼라 2인자인 셰이크 나임 카셈,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이슬라믹지하드(PIJ) 지도자 지야드 알나카라, 예멘 후티 반군의 무함마드 압둘살람 대변인 등 이란의 지원을 받아온 ‘저항의 축’ 핵심 요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하니예는 이 행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간 뒤 공격을 받았다.
하니예가 평소 체류해온 곳은 하마스 정치국 본부 소재지인 카타르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미국·카타르·이집트 주도의 휴전 협상에서 하마스 입장을 결정해온 인물도 하니예였다. 1962년 가자지구 알샤티 난민캠프에서 태어난 하니예는 1980년대 가자이슬람대 재학 중 하마스에 합류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의 승리를 이끌어 총리가 됐지만 이듬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최대 정파인 파타와 갈등을 빚으며 해임됐다. 2007년 하마스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가자지구의 지도자를 맡은 뒤 2017년 2월 야히야 신와르에게 직을 넘겼고, 그해 5월 정치국 의장이 됐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이날 하니예 암살 사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스틴 장관은 이스라엘이 공격을 받으면 방어를 돕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확전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외교적 만남을 통해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대처에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 순방 중인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싱가포르에서 “미국은 암살을 인지했거나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이란의 주장대로 테헤란에서 하니예를 사살했다면, 지난 4월 19일 이후 두 번째로 이란 본토를 타격한 셈이 된다.
강경 보수가 득세하는 이란에서 보기 드문 개혁파로 평가받는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는 성명에서 하니예의 죽음을 애도한 뒤 “비열한 행동을 후회하게 만들겠다. 저항의 길은 어느 때보다 강해질 것”이라며 “우리 영토를 보전하고 존엄성을 수호하겠다”고 말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도 “범죄자 시온주의 정권(이스라엘)이 우리의 손님을 순교하게 했다”며 “그들이 가혹한 징벌을 자초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란 영토에서 발생한 쓰라린 사건과 관련해 그의 피값을 치르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여겨야 한다”면서 대이스라엘 보복을 지시했다.
앞서 이스라엘은 지난 30일 베이루트를 폭격해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의 최측근인 푸아드 슈크르를 제거했다. 이스라엘군은 슈크르가 가자지구 전쟁 발발 이후 이스라엘 북부를 겨냥한 헤즈볼라의 공격을 지휘해 왔고, 특히 지난 27일 이스라엘 점령지인 골란고원 마즈달 샴스의 축구장을 폭격해 아동·청소년 12명을 숨지게 한 장본인이라고 밝혔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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