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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ELS 자율배상은 타당한가

권기석 경제부장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대규모 손실 사태는 결국 은행들의 자율배상으로 귀결되는 모습이다. 금융감독원이 분쟁조정기준을 제시했고, 각 은행지주는 최근 이사회를 열고 자율배상 방침을 확정했다. 일부 은행은 투자자와 합의를 거쳐 배상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평균 배상률이 40%로 정해지면 2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배상금이 투자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자율’과 ‘배상’이라는 단어의 조합도 어색하지만 이런 식의 해법이 타당한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자율배상은 ‘투자자 자기책임원칙’에 어긋난다.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라 이익이나 손실을 투자자 스스로 감수한다는 게 자기책임원칙이다. ELS뿐 아니라 모든 금융상품에 이 원칙이 적용된다.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옆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든 투자계약서에 자필로 서명했다면 이익이든 손해든 기본적으로 투자자 책임이다. 상품 구조에 문제가 없다면 말이다. 지금 상황이라면 대부분 H지수 ELS 투자자가 손실 일부를 배상받을 것으로 보인다. 불완전판매가 있었다고 하지만 피해 대상을 이렇게 폭넓게 정하는 건 자기책임원칙을 훼손하는 행위로, 앞으로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 선거를 앞두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배상 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두 번째로 이번 자율배상은 무엇에 대한 배상인지 모호하다. ‘불완전판매’에 대한 배상인가, 아니면 ‘불안전판매에 따른 손실’에 대한 배상인가. 논리적으로 불완전판매에 대한 배상이어야 타당하다. 은행이 잘못한 건 손실을 알고 상품을 판 게 아니라 판매 과정에서 손실 가능성을 충분히 알리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익이 났더라도 불완전판매가 있었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게 옳다(그런 요구가 없는 건 이익이 난 경우 판매 과정이 어떻든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금감원 분쟁조정기준은 ‘손실의 00%’ 등 손실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세 번째로 자율배상이 해결책이 되면서 인적 책임의 문제가 희석돼버렸다. 금감원 조사에서 밝혀졌듯 은행은 H지수 ELS 판매 과정에서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했다. 청력이 약한 80대 고객이 ‘들리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이해했다’고 답하라고 요청하는가 하면 계약서를 대리로 작성하거나 판매 과정을 허위로 녹취한 사례도 있다. 배경에는 각 영업점에 대한 은행의 판매 압박이 있었던 것으로 당국은 판단한다. 그렇다면 무리한 판매를 종용한 경영진에 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지만 그 이야기는 쏙 빠져버렸다. 금감원이 사태 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선 은행에 제재나 과징금을 감경해 주겠다는 입장이어서 이대로 배상이 이뤄지면 인사 관련 조치는 그냥 넘어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마지막으로 자율배상 안이 제시되면서 금융 당국의 책임 문제도 사라져버렸다. 불완전판매의 당사자는 은행이지만 수년간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금감원의 책임도 작지 않다. 과거 이보다 더 심각한 여러 금융 사고를 겪고도 감독자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이다. 하지만 자율배상 안과 함께 금감원의 심판자 역할이 부각되면서 당국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좁아졌다.

이번 해결책이 또 다른 금융 사고의 재발을 막으려는 것이었다면 ‘명백한 불완전판매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장 바람직했을 것이다. 금융 당국이 확실히 불완전판매를 당한 피해자에 한정해 소송 지원 등의 구제책을 마련했다면 ‘자기책임의 원칙’은 훼손되지 않았을 것이다. 해당 소송의 결과로 은행이 손해배상을 하는 것과 함께 형사처벌을 받게 됐다면 불완전판매가 얼마나 심각한 행위인지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권기석 경제부장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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