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밀려 스페인 여행 리스트에서 자주 빠지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도시다. 매년 수십만명의 여행객이 이곳을 찾는다.
이 도시는 그리스에 의해 2000여년 전에 세워졌으며 카르타고·고트족·로마·이슬람·기독교인 등의 지배를 순차적으로 받았다. 기원전 2세기쯤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장악해 ‘발렌시아’라 이름 지었다. 국민적 영웅 엘시드가 탈환했고 15세기에는 아라곤왕국의 왕 하메스 1세에 의해 황금기를 맞았다.
발렌시아는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양식부터 현대적인 건축물까지 장대한 역사의 흐름을 품고 있다. 발렌시아 대성당과 미겔레테 종탑을 비롯해 ‘100개의 종탑도시’라 불릴 만큼 종교 건축물이 풍부하다.
발렌시아 시내 여행은 옛 시가지에서 시작한다. 19세기 중엽까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성벽 대부분은 철거됐으나 토레스 데 세라노와 토레스 데 콰르트는 보존돼 있다. 세라노 문은 발렌시아의 유명한 축제인 ‘불의 축제’ 때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성벽은 발렌시아가 과거 얼마나 강대한 도시였는지를 대변해 준다.
발렌시아 대성당은 이슬람 모스크 자리에 1262년부터 200여년간 지어졌다. 기본적으로 고딕 양식을 갖추고 있지만, 로마의 영향을 받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바로크 양식도 지니고 있다. 레이나 광장 쪽에 바로크 양식의 주 입구가 있다. 대성당은 ‘벽화 성당’이라 불릴 정도로 내부에 많은 벽화를 품고 있다. 특히 산토 칼리스 예배당 안에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다는 성배가 안치돼 있다.
성당에는 도심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미겔레테 종탑이 있다. 1381년 건설이 시작돼 1429년 완공된 높이 약 70m의 팔각형 건축물이다. 200여개의 좁은 계단을 올라 종탑 정상에 서면 탁 트인 도시 전경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종탑 위 출입구에 설치된 녹색·적색의 신호등이 이색적이다. 두 사람이 교행하기에 협소한 종탑을 오르내리는 데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상향 또는 하향 한 방향으로 사람들이 지날 수 있도록 통제하기 위해 설치됐다.
산 니콜라스 성당도 빼놓을 수 없다. 골목 안에 작은 안내판만 있어 지나치기 쉽다. 성당 내부는 섬세하고 정교한 벽화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이야기가 밀접하게 연결되는 프레스코화가 천장과 벽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발렌시아의 번영을 말해주는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비단 거래소’(La Llotja de La Seda)다. 발렌시아가 유럽의 주요 무역 항구 중 하나였던 15세기 말 비단 교역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화려한 후기 고딕 양식을 띠고 있다. 계약이 이뤄지던 메인 홀을 비롯해 해상 재판소, 올리브유 거래소 등 당시 무역과 관련된 시설이 들어서 있다. 뾰족한 아치형 창문과 출입구, 아치형 천장, 옥상의 괴물석상, 로마 지도자 40명의 르네상스 메달리온 등이 잘 보존돼 있다. 오렌지 나무가 심어진 전형적인 스페인식 중정도 갖추고 있다. 메인 홀의 꽈배기 모양 기둥과 중심축 없이 지어진 석조 나선형 계단이 독특하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라스 파야스’(Las Fallas)는 스페인 3대 축제이자 발렌시아 전통 축제다. 파야스란 고전 라틴어 ‘팍스’(fax)에서 유래한 중세 발렌시아어로 ‘높은 위치에 놓인 횃불’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축제와 축하행사용으로 만든 기념 작품을 가리킨다.
축제는 봄맞이 대청소를 위해 낡은 집기나 인형 등을 모닥불에 태워 없애는 관행에서 시작됐다. 18세기부터 목수와 예술 및 건축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니놋’(Ninot) 인형을 만드는 형태로 발전했다.
발렌시아 시민들은 축제를 위해 기금 모금행사를 진행하며, 1년간 니놋을 구상하고 만들어 축제 기간에 거리를 채운다. 콘테스트를 통해 오직 1등 작품만 파야스 박물관에 보관되고 나머지는 축제 마지막 날에 불태워진다. 시대별로 사용된 재료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매년 3월 열리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올해는 지난 1~5일 간소하게 개최됐다.
발렌시아(스페인)=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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