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꽃피던 공론장… 帝政 꿈꾼 카이사르 피 뿌려진 곳

[세계의 광장을 가다] ② 포로 로마노(로마 제국의 심장)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다본 포로 로마노 전경. 세 개의 기둥만 남은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이 긴 세월을 견디며 우뚝 서 있다. 북쪽 끝 포로 로마노 종점에 공공관리기록소인 타불라리움(붉은색 건물)이, 그 너머엔 캄피돌리오 언덕이 있다.

그리스문명이 잉태된 곳이 아고라였다면, 로마문명의 토대는 ‘포로 로마노(Foro Romano)’였다. 둘의 공통점은 민주주의와 여론 형성의 공론장인 광장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아테네 고대 아고라에서 시작된 민주주의가 작은 도시국가에 적용된 직접민주주의 형태였다면, 삼권 분립의 현대 대의민주주의는 로마 공화정에서 출발했다. ‘로마인의 광장’ 포로 로마노는 로마 공화정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기원전 509년 로마 왕정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공화정의 입법기관이었던 원로원은 권력자(집정관)의 독주를 막기 위해 법적인 견제 장치를 고민했고, 공화주의자 키케로는 연단에 올라 직접 시민들에게 공화정을 지켜내자고 호소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브루투스는 원로원과 민중이 주인인 공화정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로마 ‘제국’을 만들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했다. 이 모든 게 이뤄진 현장이 포로 로마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유럽에 확산되기 전인 2월 15일 이탈리아 로마 중심부에 있는 포로 로마노를 찾았다. 아테네 고대 아고라처럼 포로 로마노 역시 1000년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폐허가 되어 조각난 대리석과 무너진 건물 더미의 숲처럼 보였다. 그래도 몇몇 개선문과 신전은 로마의 뛰어난 건축술을 증명하듯 여전히 건재했다.

포로 로마노를 조망하기 위해 팔라티노(palatino) 언덕에 올랐다. ‘로마’라는 도시국가가 시작된 팔라티노는 ‘왕궁의 언덕’으로, 오늘날 팰리스(palace)의 기원이 된 지역이다. 포로 로마노는 팔라티노 언덕에 모인 풍부한 물이 아래로 흘러들어 만들어진 늪지대였다. 로마의 악명 높은 네로 황제는 포로 로마노에 인공호수를 조성해 해전을 즐기기도 했다. 고대 로마의 개척자들은 포로 로마노 지하에 관개시설을 설치해 고인 물을 테베레강으로 흘려보내고 로마 공화정을 위한 광장으로 조성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면 왼쪽으로 캄피돌리오 광장과 인접한 공공기록관리소 타불라리움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농사의 신을 모신 사투르누스 신전과 콘코르디아 신전 기둥이 들어서 있다. 포로 로마노 가운데에는 베누스 신전 터, 카스토르와 풀룩스 신전 기둥이 우뚝 서 있고, 그 뒤로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신전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가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콜로세움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포로 로마노 입구를 지나면 바로 왼편에 티투스 개선문이 나온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형 티투스 황제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예루살렘 전투 승전을 기념해 81년에 세운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로마제국을 창건한 율리우스 가문을 물리치고 새로운 황제로 등극한 플라비아누스 가문의 도래를 알리는 정치적 상징물이다.

포로 로마노를 관통하는 ‘성스러운 길’은 고대 로마시대 모든 길의 종착지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모든 길이 로마로 연결돼 종착지가 된 곳이 포로 로마노를 관통하는 ‘성스러운 길’(비아 사크라)이다. 티투스 개선문은 콜로세움에서 성스러운 길로 나아갈 때 통과해야 하는 관문처럼 우뚝 솟아 있다. 포로 로마노에서 시작된 대의민주주의가 로마 공화정의 꽃을 피우고, 나아가 로마 제국의 토대가 되어 콜로세움이라는 위대한 건축물을 낳았다.

로마 시민들은 원로원 건물 앞 코미티움의 공공발언대인 로스트라(붉은 연단)에 올라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포로 로마노 북쪽 끝에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의 오른편 붉은 벽돌 건물이 원로원(Curia)이다. 원로원은 300명에 달하는 로마 귀족들이 법령을 심의하고, 법 집행의 공정성을 따지던 곳이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완공됐다. 하지만 3세기 말 로마 대화재로 불타버렸고, 현재 건물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복원한 것이다. 기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 원로원 건물에는 가림막이 쳐져 있고 보수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원로원 건물 앞에는 ‘코미티움(Commitium)’이 있다. 시민들이 모여 집정관을 선출하던 곳이다.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원로원의 의결권이 강화되었고, 이를 견제하려던 서민들은 코미티움에 모여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폈다. 로마 공화정 시대는 민중이 주인이었기에 코미티움에 공공발언대인 ‘로스트라’가 설치됐다. 로마 시민은 누구든지 로스트라 연단에 올라 원로원 건물을 등지고 서서 귀족정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다. 포로 로마노는 성년 남자들이 모일 수 있는 규모로 조성됐고, 음향장비가 없어도 육성에 의한 메시지 전달이 가능한 구조였다. 지금도 포로 로마노에는 로스트라 연단이 남아 있다.

포로 로마노 중간에는 작은 동굴 같은 화장터가 있다. 기원전 44년 브루투스와 원로원 의원들이 휘두른 칼에 23번 찔려 암살당한 카이사르가 산화한 곳이다. 셰익스피어 연극 ‘줄리어스 시저’에는 브루투스가 포로 로마노 연단에서 행한 추도연설 대목이 나온다. “시저와 절친한 누군가 나한테 왜 시저에게 반기를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이렇소. 내가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오. 여러분은 시저가 죽고 모두들 자유인으로 살기보다 차라리 시저가 살아 있고 모두들 노예로 죽고 싶소?”

키케로의 마음도 브루투스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키케로는 포로 로마노의 로스트라에 올라 공화정의 위기를 설파하며 카이사르 부관이었던 안토니우스가 권력의 공백을 노리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결과 키케로는 잘려나간 자신의 머리와 팔이 로스트라에 내걸리는 파국을 맞으며 마지막까지 로마공화정과 운명을 같이했다.

포로 로마노의 북쪽 캄피돌리오 언덕에는 시장이 있었다. 로마 시민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거래하고 바로 아래 포로 로마노로 내려와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로스트라 연단에 올라 자유 발언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포로 로마노는 귀족과 평민들이 로마 시민으로 함께 만나 소통하고 토론하며 여론을 형성한 곳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고, 여론 형성의 공론장이 되는 광장의 기원을 포로 로마노에서 찾는 이유다.

우리나라도 전국 도로의 기점이 되는 세종로 사거리에서 광화문까지의 대로가 조선시대에는 행정의 중심인 육조거리였고, 지금은 광화문광장이 조성돼 있다. 이제 그 공간이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을 통해 시민들이 편하게 걷고,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되고 자유롭게 의견을 펼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로마=글·사진 김재중 선임기자 j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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