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특구 주변에 장벽 쌓아
타 지역서 밀려드는 인력 통제
그 사이 선전 GDP 1만배 증가
이웃 홍콩·마카오와 교류도 늘어
물리적 벽 무용지물… 철거 발표
비약적 경제성장 자신감 표현
중국의 암흑기인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아버지 시중쉰도 1978년 2월 허난성 뤄양 하방(下放·공산당 간부를 농촌이나 공장으로 보내 일하게 하는 것) 생활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간다. 곧이어 그는 중국의 남쪽 관문인 광둥성 책임자로 내려간다. 덩샤오핑은 그해 6월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은 실천”이라는 말로 개혁개방을 부르짖던 때였다. 시중쉰도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강조하며 홍콩·마카오와 가까운 ‘광둥성 특구’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킨다. 그는 “참새는 비록 작지만 오장육부는 다 갖춘 동물”로 비유하며 광둥성의 자치권을 요청했다. 덩샤오핑은 “먼저 부자가 되라”는 선부론을 거론하며 제안을 수용했다. 광둥성 선전은 그렇게 경제특구가 됐다.
선전은 80년에 경제특구로 지정될 당시 인구 3만명의 ‘바오안’이란 이름의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특구로 지정된 선전은 세금 우대 조치 등 각종 정책적 특혜로 외국 자본과 기업을 끌어들이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인구 1200만명에 텐센트, 화웨이 등 굴지의 IT 기업과 스타트업이 밀집한 첨단 국제기술도시로 탈바꿈했다. 79년 2억 위안(약 330억원)도 안됐던 선전의 지역총생산(GDP)은 2016년 1조9300만 위안(약 320조원)으로 1만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스웨덴, 폴란드 등 웬만한 유럽국가 네 곳의 GDP를 합쳐놓은 수준이다. 난산구와 푸텐구 등 일부 지역의 1인당 GDP는 이미 4만 달러를 넘어섰다. 중국의 경제 부흥은 선전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전은 현재는 상하이와 홍콩에 버금가는 국제금융도시로 도약을 서두르고 있다.
40년 전 선전 경제특구는 현재의 선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인 셈이다. 이에 따라 개혁개방 40년 역사를 뛰어넘어 중국 경제의 자신감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가 발표됐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16일 선전 경제특구와 다른 지역 간의 인적·물적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세웠던 장벽과 검문소가 4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고 보도했다. 중국 국무원은 15일 선전시의 물리적 경계를 없애 지역 통합을 촉진하도록 해달라는 광둥성의 요청을 승인했다.
중국 정부는 선전 특구 지정 당시 몰리는 인파를 통제하려고 시 주변에 136㎞ 철제 울타리를 치고 검문소를 설치했다. 특구 밖 주민은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장벽은 점차 걸림돌로 작용했다. 중국 정부는 이미 2010년 경제특구를 선전시 전체로 확대했다. 광둥성 9개 도시와 홍콩, 마카오를 묶어 세계적 경제권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인 웨강아오(광둥·홍콩·마카오) 플랜까지 추진되면서 선전 특구 내 장벽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됐다. 선전 특구 울타리와 검문소를 허무는 작업은 이미 수년 전부터 진행돼 왔다. 국무원의 이번 결정은 상징적 조치이며, 선전 내 경계가 필요 없어졌다는 것을 법적으로 최종 인정한 것이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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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완수”… 中 ‘선전특구’ 40년 만에 장벽 허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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