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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남호철] 현대판 ‘창지개명’

홍보 위해 지명 바꾸려는 지자체 부쩍 늘어… 지명의 근원과 어울리는 스토리 찾는 게 필요

[내일을 열며-남호철] 현대판 ‘창지개명’ 기사의 사진
야동, 고자리, 대가리, 월경리, 생리, 사정리, 유방동, 마시리, 파전리, 파산리, 사탄마을, 유령마을….

우리나라에 실제 존재하는 지명들이다. 언뜻 야하고 금기시되거나 기피되는 마을 이름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름 속에는 역사와 이력이 담겨 있다. 야동은 쟁기·무기를 만들던 야곡(풀무골)에서 나온 지명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마을 이름의 근원을 생각하지 않고 편의에 맞게 바꾸거나 의도적으로 가치를 낮추면서 왜곡된 것도 적지 않다. 유방동은 일제강점기에 유곡과 방축동을 합치며 생겼다. ‘고자’는 ‘고정’(높은 언덕의 정자)을 한자로 잘못 적으며 나온 이름이다.

생긴 연유야 무엇이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지명을 반기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바꾸기 위해 주민 서명을 받아 청원도 하고 호소도 했으나 대부분 허사였다. ‘도로명 주소’가 공식적으로 시행되면서 오래된 지명들이 사라진 것도 안타깝다.

특색을 담아 이름을 바꾼 사례도 적지 않다. 강원도 영월군은 2009년 한반도 지형을 닮은 선암마을이 있는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김삿갓 묘와 생가가 있는 하동면을 ‘김삿갓면’으로 변경했다. 주변 지방자치단체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아 허용된 사례다. 여기에 영월군은 수주면과 남면의 행정구역 명칭을 ‘무릉도원면’과 ‘태양면’으로 각각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수주면에는 맑은 계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무릉리와 도원리가 있고 남면에는 동양 최대 규모인 40㎿ 발전용량의 태양광발전소가 자리잡고 있어서다.

이름 변경을 신청했지만 허용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지역 홍보를 위해 유명한 지명을 독점하려는 몇몇 지자체들의 이름 전쟁에 제동이 걸렸다. 대법원은 최근 경북 영주시가 단산면을 ‘소백산면’으로 변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소백산은 전국에 알려진 산의 고유명사로 주변 지자체와 주민 등이 함께 사용해 온 만큼 영주시가 일방적으로 소백산 명칭을 선점해 행정구역 명칭으로 사용하면 다른 지자체와 주민 등의 이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영주시는 단산(丹山)이 인접한 충북 단양군의 옛 이름인 데다 ‘붉은 산’이란 이미지도 좋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개명을 추진해 왔다. 소백산 국립공원 면적(322㎢)의 절반 이상이 영주시 관내라는 점도 고려됐다.

이 판결은 강원도 양양군이 서면을 ‘대청봉면’으로 개명하려는 움직임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양양군은 지역의 관광 자산인 설악산 대청봉을 내세워 개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설악산을 끼고 있는 인제, 속초, 고성 등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문화·관광·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 지역을 쉽게 홍보할 수 있는 이미지를 내세운 지자체들의 개명 움직임이 부쩍 늘었다. 잘못된 이름을 바로잡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름이 너무 가볍게 바뀌는 것은 옳지 않다. 사물을 가리키는 기능을 지닌 이름이 자주 바뀌면 제 몫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지명은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역사관 그리고 자연관을 함축하고 있다. 이름만으로 그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정겨운 지명들도 상당수다.

서양에는 중세의 이름들이 많이 보존되고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름들이 드물지 않다. 무턱대고 이름만 바꿀 게 아니라 그 지명이 생겨난 근원과 거기에 어울리는 스토리를 찾아내는 게 더 필요하다.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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