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그리스도인은 몸서리치는 양자택일 앞에 서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안전한 가운데 그런 선택을 할 순 없습니다.”
‘독일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는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가 1939년 미국 유니언신학교 초청으로 현지서 지내다 2주 만에 귀국 의사를 밝히며 한 말입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 초창기부터 라디오 방송 등에서 “총통 숭배에 빠져선 안 된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습니다. 이런 그에게 귀국은 곧 죽음과도 같았기에 주변에선 미국에 남을 것을 강권합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뜻을 굽히지 않고 같은 해 7월 베를린으로 돌아옵니다.
기독 고전 맛집의 11번째 책 ‘성도의 공동생활’(복있는사람)은 본회퍼가 미국에 떠난 그해 출간된 책입니다. 나치의 반유대정책에 휩쓸리는 독일인이 늘어나는 걸 목도하며 쓴 이 책에는 참된 성도의 교제와 교회 공동체, 섬김 등의 원론적 내용이 담겼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로 시작하는 책은 원수에게 평화를 선사한 예수처럼 성도 역시 “수도원이 아닌 원수 속에서 살아가는 게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일과 사명이 바로 그곳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근거하므로 정신적 실재가 아닌 영적인 실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정신은 인간의 자연적 충동을, 영은 성령을 일컫습니다. 영적 공동체는 그리스도에 힘입어 섬기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지만 정신적 공동체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속박한다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특징을 ‘영적인 공동체’로 설명하며 이 둘의 차이를 명확히 분별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신적 공동체를 추구하다보면 차별과 선택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적 사랑은 “타인을 자기 자신에게 예속된 존재로 사랑하나” 영적인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해 타인을 사랑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영적과 정신적, 두 분류를 계속 강조하는 건 인간은 몽상(夢想)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 공동체 자체보다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기독교 공동체의 파괴자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자기의 이상을 위해 타인을 기꺼이 희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여러 환영의 아침 안개가 걷히는 곳에 기독교 공동체의 밝은 하루가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 역시 이 책으로 한 최근 설교에서 “몽상이 깨어지는 곳에서 참된 공동체가 시작될 수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약자만 강자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며 “약자를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건 곧 그 공동체의 죽음을 의미한다”고도 말합니다. 베를린에서 절멸 위기에 놓인 유대인 구출에 나섰던 본회퍼의 삶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는 “귀 기울이는 섬김과 적극적으로 돕는 섬김,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그의 짐을 짊어지는 섬김”을 강조하며 “겸손과 온유로 서로 용납할 것(엡 4:2)”을 당부했습니다.

이 말처럼 본회퍼는 어떤 어려움에도 약자 섬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치 저항운동에 동참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됐습니다. 이후 부헨발트 등의 수용소를 전전하다 1945년 4월 9일 플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 이송돼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로써 끝입니다. 하지만 내겐 삶의 시작입니다”란 그의 유언처럼 본회퍼의 죽음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를린지방법원은 본회퍼 사후 51년만인 1996년에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한 행동”이란 이유로 그를 복권했습니다.

올해는 본회퍼가 서거한 지 8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각종 갈등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 가운데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국가를 참된 공동체로 만드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리스도의 섬김을 강조한 본회퍼의 조언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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