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도 울고 가는 한국 증시 [배병우의 퍼스펙티브]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 보고서
‘한국-이제 좀 그만(South Korea-enough is enough)’

입력 : 2024-03-04 00:01/수정 : 2024-03-04 23:01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2019년 5월 5일(현지시간)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연례 주주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AP뉴시스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의 저평가 현상)’가 국민적 관심사가 된 가운데 자본시장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외국 투자사의 한국 리포트가 있다.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 인베스트먼트’가 지난해 12월 투자자들에게 보낸 ‘한국-이제 좀 그만(South Korea-enough is enough)’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보고서다. ‘이너프 이즈 이너프(enough is enough)’는 영어사용자들이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더는 못 참겠다 싶을 때 단호하고 화난 목소리로 외치는 말이다.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았는데, 질렸다. 이제 그만해!’라는 의미다.

14년 동안 이 헤지펀드의 아시아(일본 제외) 지역 투자전략을 맡아온 조너선 파인스 선임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악명높은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거버넌스)에 있다고 지적한다. 소수수주(일반주주)에 대한 고질적인 부당한 취급(mistreatment)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가 지속되는 메카니즘으로는 기업을 지배하는 소수의 재벌가의 지나치게 큰 정치적 영향력과 큰 규모의 재산에 적용되는 매우 높은 상속세율 등을 꼽았다.

악명 높은 기업 지배구조가 주가 저평가 원인
헤르메스는 수준 이하의 법률과 규정 덕분에 한국의 지배주주들은 온갖 기발한 방식을 동원해 자신들에게 많은 수익을 가져갈 수 있지만 일반주주들은 자신들의 몫을 잃을 수 있다고 했다. 헤르메스는 한국의 지배주주들이 회사 수익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방법과 수단을 자신들이 피해를 본 경험까지 녹여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헤르메스인베스트먼트의 ‘한국-이제 좀 그만(South Korea-enough is enough)’ 보고서 표지. 헤르메스인베스트먼트


주가 상승 바라지 않는 ‘이상한’ 한국 기업들
높은 상속세 때문에 대주주들은 자신이 통제하는 회사(특히 지주회사)의 주가를 낮게 유지하려는 유인을 갖게 된다. 상속세가 사망 시점의 지분 시장가치를 기준으로 매겨지기 때문이다.

보유한 현금이 풍부하며 꾸준히 이익을 내는 기업조차 배당성향이 매우 낮은 이유다. 기업 경영진은 주가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게 통념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배당을 적게 줘 주가를 낮추는 게 대주주의 이익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낮은 배당률로 인해 현금이 더 필요하면 지배주주는 자신이 통제하는 회사로부터 현금을 뽑아낼 다른 방법을 찾아내면 그만이다. 자신이 통제하는 또 다른 회사와의 특수관계자 거래를 통해 모회사의 자산을 이전할 수 있다.

특수관계자 거래는 일반주주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거래가 성사되고 한참 지난 뒤 연간 재무제표의 각주 정도로만 공개될 뿐이다. 이런 거래를 통해 지배주주는 회사에서 현금을 뽑아낼 뿐 아니라 불공정한 가격 책정을 통해 일반주주가 가진 부를 지배주주에게 이전할 수도 있다.

일반주주의 부를 이전해가도 ‘적법’
지배주주는 주식 가격을 떨어뜨리고 일반주주들이 자신에게 보유한 주식을 팔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일반주주는 지배주주가 더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고, 더 비싸며, 부채가 더 많은 관계 회사의 주식과 자신이 처음에 투자한 주식을 강제로 교환해야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 주식에 대한 일반 투자자의 지배권이 사라지며 손해를 보게 되지만 이 모든 게 한국에서는 합법적이다.


이런 주식 교환이나 신규 주식 발행 과정에서 한국 증시 투자자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시점, 예를 들면 자신의 주식 가격이 내재가치에 비해 특히 저평가된 시점에 주식을 팔도록 강요당하게 된다.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은 주식 시장은 인내심 없는 자의 돈을 인내심 있는 자에게 이전하는 도구라고 말했다. 가치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은 단기적으로 주식 시장은 투표 기계와 비슷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정교한 저울 같다고 말했다. 길게 보면 증권시장은 기업의 본질적 가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가치투자 아버지 그레이엄의 이론도 한국선 무용지물
하지만 헤르메스는 이것이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신이 만약 한국의 주식을 산다면 장기 투자를 유지할 수 있다고 절대로 보장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주식 매각 시점을 주식시장의 투자자가 아니라 지배주주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투자자는 이처럼 일반주주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사례에 대해 이사가 주주에 대한 신의·성실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소송을 제기해 책임을 물으면 될 것 아니냐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상법에는 ‘이사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돼 있을 뿐이다. 이사가 주주에 대해 신의·성실을 다 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다. 이사가 일반주주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행동하더라도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MSCI Asia ex-Japan Index를 구성하는 10개 국가 중에서 특히 경제 규모가 가장 큰 중국과 한국의 지난 15년 간의 주가 상승률이 저조한 것이 눈에 띈다. 헤르메스인베스트먼트

판사에까지 해결책 호소했으나 효과 없어
헤르메스는 지배주주들의 갖가지 변칙 행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이에 대항해 왔다. 주주총회에서 여러 가지 해결책을 제안했고, 의결권 대리기관, 이사들, 지배주주, 심지어 판사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들과 직접 만나 해결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는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PBR 1 이하 기업 모든 이사에 반대표”
이에 따라 헤르메스는 올해 주주총회를 시작으로 적극적으로 의결권 행사에 나설 계획이다. 보고서는 “최근 일본 상황을 교훈 삼아 한국의 취약한 지배구조에 대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헤르메스는 “정부의 규제나 오랫동안 지속하는 경기침체 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순자산가치 대비 주가(PBR)가 1 이하인 기업에 대해 모든 이사의 재선임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질 계획”이라고 했다.

또 PBR이 1 이상인 기업이더라도 이전 3년간 회사에 불공정한 것으로 보이는 특수관계자 거래를 했고, 당시 일반주주에게 별도의 찬반 투표 기회를 주지 않은 등의 기업에 대해서 앞으로 같은 원칙을 적용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이 보고서에 대해 “한국 자본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피부에 와닿게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이번 주총 시즌에 일반주주에게 불리한 법과 규정에 대해 국내외 이해관계자들의 많은 문제 제기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배병우 수석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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