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전 10시 30분 경남 김해시 대동면. 차를 타고 마을 어귀에 내리자 낮 기온 22도에 활짝 핀 매화가 보였다. 뒤로 보이는 농장 입구에서 박성운(54) 금농농산 대표가 손짓했다. 그를 따라 700㎡ 규모의 후덥지근한 비닐하우스에 들어가니 천장에서 2m 높이로 설치된 하얀색 끈이 뿌리 쪽까지 내려와 있었고 빨강, 주황, 노란색의 길쭉한 작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박씨는 “이런 거 처음 보시죠”라고 웃었다. “드셔보세요. 얼마나 단지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이게 바로 ‘키다리 파프리카(품종명 피콜로)’입니다”
박씨가 건넨 채소를 손에 쥐자 그 크기가 체감됐다. 키다리 파프리카는 세로 길이가 짧고 좌우로 퍼져 자라는 일반 파프리카와 달리 길이 20~30㎝, 두께 4~5㎝로 손에 꽉 찼다.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아삭아삭하고 달달한 즙이 혀끝에 감돌았다. 마치 설탕 반티스푼을 입안에 한 번에 털어 넣는 정도의 당도였다. 단단해 보였던 과육은 부드럽게 씹혔고, 일반 파프리카에서 봤던 굵은 씨방과 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란색과 초록색이 반반 섞인 키다리 파프리카를 가리키며 “자라날 때는 이렇게 말랑말랑하지만 수확할 때가 되면 조직이 단단해져 쉽게 무르지 않는다. 색깔도 진해지고 당도가 올라간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도를 집어 들고 일반 파프리카를 반으로 갈라 시식을 권했다. 확실히 맛이 밋밋하고 과육이 질겨 단번에 비교됐다.
파프리카인데 단 이유를 묻자 10년 경력의 베테랑 이마트 채소 바이어 김갑곤(50)씨가 “당도가 최대 12브릭스(Brix·과실의 당도 단위)까지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반 파프리카 당도가 6~7브릭스 수준이고 같은 과 채소인 토마토가 5~6브릭스인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달달한 향과 맛이 특징인 딸기 당도가 11~12브릭스(Brix·과실의 당도 단위), 사과가 12~13브릭스인 걸 비교하면 당도가 높은 셈이다. 달달한 맛으로 인기를 끌었던 ‘스테비아 방울토마토’가 생각난다고 하자 농장의 한 직원이 “그건 설탕을 대체하는 감미료인 스테비아를 주입시켰지만 이건 빛과 영양분으로만 오로지 키워냈다”고 강조했다. 농장주 박씨는 재빠르게 키다리 파프리카 과육을 으깨 당도를 즉석에서 측정해 보여줬다. 눈금이 9~10브릭스 사이에 멈췄다. 그는 “일주일 뒤 수확할 때면 당도가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키다리 파프리카는 지금까지 국내 시장에서 팔린 적 없는 ‘신품종’으로 김 바이어가 전국을 찾아 돌며 발굴한 채소다. 김 바이어는 지난해 이마트에서 팔린 초당옥수수가 전년 대비 90% 신장률을 보이며 인기를 끌자 소비자들이 더 달고 새로운 채소를 찾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계기로 농장을 찾아다니며 트렌드를 파악하고 협력사들과 함께 전국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김해시에 있는 종묘사 ‘꾸이코리아’가 당도 높은 네덜란드 파프리카 종자 ‘피콜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김 바이어는 “피콜로를 심었던 농가가 3~4곳 있었지만 일반 소비자들에게 판매할 경로도 마땅치 않고 대량으로 심지 않으면 가격 경쟁력도 떨어져 시장에 출시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농장주 박씨는 낯설었지만 김 바이어의 제안으로 시범 생산을 위한 땅 2300㎡을 기꺼이 투입했다. 박씨는 “마침 놀고 있던 땅이 있었는데 김 바이어가 달고 신기한 파프리카가 있다고 해 심어보자고 제안해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낯선 품종으로 고민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고민이 안됐다면 거짓말”이라고 웃었다. 김 바이어도 “설날 쯤 확인차 농장을 방문했는데 생각보다 날씨가 추워서 수확을 걱정했다. 그런데 날씨가 다시 따뜻해져 문제없이 수확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일반 파프리카 농장이 1만3200㎡부터 시작하는 것을 고려하면 아직은 명함도 못 내미는 크기”라면서도 ‘스마트팜(디지털을 활용한 지능형농장)’ 시스템을 구축해 온도, 습도까지 꼼꼼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비닐하우스 내부 온도는 자동제어 장치를 활용해 낮에는 최대 30도 이하(낮 기온이 20도 이상일 때 내부 온도 상승)로 관리하고 밤 기온은 최저 18도로 이하로 떨어지지 않게 유지한다”면서 “키우면서 먹어보니 일반 파프리카보다 훨씬 맛있어서 파프리카의 트렌드를 바꾸는데 손색이 없을 것 같다”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마트와 농가는 우선 이달 중순 수확을 끝내고 약 6만 봉 물량을 전국 이마트에서 시범 판매할 계획이다. 김 바이어는 “16일 이마트 일부 점포에서 키다리 파프리카를 선보이며 전국 점포에는 23일에 진열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남쪽 땅의 날씨가 본격적으로 무더워지는 5월부터는 강원도 평창에 마련한 6600여㎡ 규모의 농장에서 생산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마트는 시범 판매 단계임에도 키다리 파프리카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다음 생산지까지 확보하는 투자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물량이 안정화되는 6월에는 3월 대비 3배 많은 키다리 파프리카를 판매한다.
당장 키다리 파프리카가 국내에서 유통된 적이 없어 생산원가 등 가격 기준이 없는 상태지만 이마트는 일반 파프리카 품종 시세를 참고해 가격을 정했다. 다만 키다리 파프리카의 가격은 일반 파프리카 대비 저렴하게 책정될 전망이다. 일반 파프리카는 씨앗 하나를 심으면 한 주(株) 당 20~30개의 열매가 달리지만, 키다리 파프리카는 한 주당 40~50개의 파프리카가 자라 가격 경쟁력이 높다. 또한 이마트가 특정 농가와 사전 계약을 맺고 심지 전부터 전량 매입하는 계약 재배방식으로 가격과 물량을 안정화해 생산량이 늘면 가격이 더욱 낮아질 수 있다. 이마트 관계자는 “이번 시범 판매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판매가 시작되는 6월에는 가격이 변동될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이마트는 즐겁게 건강을 챙기자는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의 높은 수요 속에서 키다리 파프리카가 간식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작은 크기와 높은 당도가 특징인 ‘라온 파프리카’는 이마트 파프리카 전체 매출 중 약 15%를 차지하는 인기 상품이다. 지난해 매출이 운영 첫해인 2017년 대비 150%나 늘었다. 키다리 파프리카도 단맛과 편리함은 물론 1개당 100~200g으로 포만감이 더욱 커 가성비 건강식품으로 인기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김해=조정한 기자 j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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