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양극화라는 세계 공통의 보편적인 문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지옥’처럼 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킨 문화 상품들은 한국이 사회 양극화를 치열하고 처절하게 겪고 있지 않았다면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웃픈’ 이야기다.”
이진우(65) 포스텍 명예교수는 2022년 한국 사회의 중점 과제로 양극화 해소를 꼽았다. 계명대 총장을 지낸 그는 니체 철학의 권위자로 국내 철학계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30여년간 공정, 건강한 정치적 중도문화, 균형, 개인주의 등 한국 사회의 이슈를 앞서서 포착하고 현실 정치를 바탕으로 정치철학 논의를 펼쳐왔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국 정치와 선진국 담론이 활발한 한국 사회의 현 상황에 관한 통찰을 듣기 위해 그를 만났다.
-정치철학자의 시각에서 지금 한국사회가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나.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불평등과 양극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는 기후변화, 이 두 가지가 2050년까지 향후 30년간 해결해야 할 핵심적인 문제라고 본다. 양극화는 21세기의 가장 극렬한 시대적 문제 중 하나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의 양극화, 경제적인 양극화가 낳은 빈부의 격차,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강요하는 압력은 다른 데 있다.
세계화가 앞으로 지속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미국 제국과 중국 제국이 충돌하면서 경제 체제의 탈동조화가 이뤄질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두 번째는 인공지능, 자동화, 로봇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사회에 미치는 여파다. 세 번째는 기후변화다. 스웨덴 소녀 툰베리가 이슈를 제기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응이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대선 정국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문화 상품을 말씀하셨는데, K콘텐츠의 부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문화적으로도 선진국의 위상을 갖췄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국민과의 대화에서 “한국은 모든 면에서 ‘톱텐’의 나라가 됐다”며 “자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나 경제 규모, 무역 어느 지표를 보더라도 세계 10위권 경제 선진국임은 틀림없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자존감이 상당히 높아졌다. 그러나 정치 선진국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중국 한국 일본의 극동 3국 중 시민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고, 87년 이후 형식적인 면에서 실질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문화적 관점에선 여전히 후진성을 벗지 못하고 있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한국의 대선 정국은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다양성을 포용하면서 나름의 질서가 있는 사회가 선진사회다. 우리 사회는 다양해졌는가. 정치적 측면에서는 특히 그렇지 못하다.”
-선진국 담론과 함께 한국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관점과 비관적 관점이 공존한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을 추격하는 단계가 아니라 이미 추월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K콘텐츠는 회광반조 같은 마지막 불꽃일 뿐 한국의 성장 동력은 멈췄으며 지금이 한국 국력의 정점일 것이라는 파국론도 있다.
“추월했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에서 ‘퍼스트 무버’(선도자)가 돼야 한다는 담론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이 서구가 만들어 놓은 선진국-후진국의 담론을 깨고 ‘퍼스트 무버’가 되려면 사회적 양극화와 기후변화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국뽕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재미있는 점은 유럽에서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면 보수이거나 극우인데 한국에서는 진보나 극좌다. 성장세대는 지금의 경제적 번영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우려하지만 마지막 불꽃처럼 반짝거린 후 하얀 재로 스러질 것이라는 전망은 지나친 비관론이 아닌가 한다.”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이번 대선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정권은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현재는 정권 교체를 지지하는 진영과 정권 유지를 바라는 진영 간의 권력 싸움이 돼 버렸다. 대선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첫째, 소위 법치주의와 동일시되는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이다. 정권교체 여론이 높은 심층의 동기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불안감이 아닐까. 대통령과 의회 권력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의 다수를 여당이 장악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이지만 그것이 실행되고 표현되는 방식은 독재일 수도 있음을 국민들이 느끼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할 미래 비전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다. 지금은 후자가 전자에 묻혀 있지만 두 번째 방안을 누가 제시하느냐에 따라 대선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양극화 해소다. 저는 양극화보다 ‘디커플링’(Decoupling‧비동조화)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쓰는데, 남성과 여성이 비동조화되고 세대 간의 비동조화가 이뤄지면서 사회가 갈라지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비동조화도 그렇다.”
-다시 동조화가 이뤄지게 하려면 어떤 방안이 있을까.
“그게 정치가 해야 할 몫이다. 세대 갈등을 예로 들면 한국에는 독특한 40대 현상이 있다. ‘세대 포위론’(국민의힘에서 말하는 전통적 지지층인 60대 이상과 보수화되고 있는 2030세대를 결합하는 선거 전략)이 나왔는데,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세대 포위 문제가 맞다. 한국은 60대 이상의 노인 빈곤이 심각하고 20대 빈곤층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유일하게 경제적으로 안정된 세대가 40대인데 이들은 진보 성향이 가장 뚜렷하다. 결과적으로 40대가 정치적 결정권도 가지고 있는 셈이 됐다. 20대는 경제적인 기회와 정치적인 기회 모두 박탈된 상황이다. 자살률을 봐도 60대 이상과 20대가 높다. 대선 후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시대정신으로 공정을 꼽는 이들도 많다. 청년 세대가 특히 공정에 목말라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철학자 존 롤스는 케이크를 공정하게 자르는 방법에 대해 말했다.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큰 몫을 가지려는 것은 기본적인 욕망인데, 자르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가져가게 하면 똑같은 크기로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공정을 이렇게만 이해하고 있다. 기본적인 것은 케이크가 커야 한다는 점이다. 20대가 기성세대에게 분노하는 동기는 간단하다.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기회의 정치적 건축 구조(architecture of opportunities)를 다시 짜야 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차기 국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리더십과 덕목은 무엇인가. 막스 베버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세 가지 자질로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을 말했는데.
“베버는 가장 기본적인 덕성으로 책임감, 책임윤리를 꼽았다. 정치인은 자신이 시행한 정책을 책임지려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책임윤리와 반대되는 것이 신정윤리다. 자기 신념에 따라 행하는 것은 아집일 수 있고 편견이나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문재인정부의 가장 큰 실정은 사회를 두 진영으로 완전히 분열시켜놨다는 것이다. 악성 분열이다. 5년 전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해결을 기대했던 사안들이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악화된 형태로 남았다는 것이 슬픈 일이기도 하다. 차기 지도자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국민은 압박하고 요구해야 한다.”
-다음 정부에는 어떤 국가 비전이 필요할까.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안전보건국가를 말하는 학자도 있고 선도국가, 공정국가 등이 제시되기도 한다.
“사회적 통합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통합국가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보다 차기 정부의 비전은 새로운 형태의 복지국가로서 포용국가가 됐으면 한다. 세계가 첨단 지식기반 사회로 전환되면서 인공지능, 자동화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것이라는 데 많은 학자가 동의한다. 그렇다면 일시적으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재충전해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초점을 맞춘 과거의 복지국가 시스템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선진국은 제조업이 붕괴되고 서비스업, 금융업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이미 이런 진통을 겪었지만 우리는 미래에 닥칠 위험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의문이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는 더 심해질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에 대한 정책적 대안이 필요하다.”
-어떤 대안을 제시해주시겠는가.
“첫째, 품위 있는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 최소한의 소득이 얼마일까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둘째, 노동은 생계 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기실현 과정일 수 있다. 사람들이 의미 있다고 판단할 만한 기회를 많이 제공해야 한다. 셋째,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져 일자리를 바꿀 때마다 원활하게 숙련된 방식으로 새 직업을 수행하기까지 리스크가 동반된다. 국가와 사회가 이 위험에 대한 보장을 해야 한다. 향후 5년은 사회에 급격한 변화가 생길 수 있고 미래에 대한 국민의 공포가 커질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사회가 공동으로 해결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21세기에 필요한 사회계약이 있다면 그것은 포용국가여야 한다.”
-많은 유권자가 이번 대선에 ‘찍을 사람이 없어서 기권하겠다’고 한다. 후보들에 대한 거부감과 실망으로 투표율이 저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참여에 있어서의 공정성을 해친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아니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면 사표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사표가 만만한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그것이 힘을 얻는다. 정치 냉소주의로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정치과잉시대라고 할 만큼 온 국민이 정치에 관심이 많지만 정치문화는 낙후돼 있다. 어떤 해법이 있을까.
“일차적으로 정당의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려면 젊은 세대와 여성들이 정치에 많이 참여해야 한다. 청년 세대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반권위주의다. 갑질, 꼰대를 사회문제화한 것은 30대 미만의 청년 세대다. 한국의 정치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반권위주의가 어느 정도 정치적 힘을 갖는 게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어느 당 하나가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지 않고 소수 정당과 연정을 통해 과반수가 되면 독주가 불가능해진다. 다당제가 답이라는 게 아니라 정당 내에 다양한 의견이 수렴될 수 있는 제도가 정착돼야 한다. 대선 이후에는 6월 지방선거, 2024년 총선이 있다. 또 한 번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검증할 기회가 될 것이다.”
-독일과 같은 정치적 시민교육을 제안하기도 하셨는데.
“건강한 시민교육과 토론 문화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의미다. 독일은 정당마다 교육재단, 장학재단이 있다. 거기서 시민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진다. 당의 이데올로기를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이슈에 관한 토론을 활성화시키고 정치적 시민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다룬다. 한국에서도 활성화됐으면 한다.”
-최근 주목하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신뢰, 상호의존,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맴돈다. 자유주의자로서 지난 30년간 저의 관심이 우리를 구속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였다면 요즘은 공진화, 공생주의와 관련된 강연을 하고 있다. 한국은 초저신뢰 사회로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리고 있다. 각자도생은 개인주의의 심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개인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의존하고 공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최근의 관심사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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