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주연] 비 오는 날의 수채화
한바탕 비가 오더니 밤이 제법 선선하다. 풀벌레 소리에 기분이 좋다. 이런 날은 아까워서 잠들기 싫다. 특별히 하는 것도 없다. 그냥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가끔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바람을 기다린다. 초저녁잠이 많지만 이때는 깨어 있으려고 발버둥친다.
‘밤’은 대개 부정적인 의미다. 어릴 적 듣던 이야기처럼 암흑 어디에선가 귀신이 불쑥 나타나 어디론가 데려 갈 것 같다. ‘밤길 조심하라’는 말이 그냥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어른이 돼가면서 밤이 좋아지는 특별한 순간을 갖게 된다.
아는 동생은 시험공부를 할 때면 어머니가 항상 같이 밤을 지새워 주었다. 어느 날 너무 졸려 하자 그의 손을 이끌고 산책을 나섰다. 많은 사람이 오가던 동네는 적막했고 하늘에는 밝은 달만 떠있어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온전히 그만의 세상이었다. 이후 그는 야행성 인간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늦여름 밤을 좋아하는 것일까. 딱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시골 산 중턱에 있는 한옥에 놀러 갔었다. 대청마루에 모기장을 치고 옹기종기 모여 잠을 청하다가 한 명씩 슬그머니 나가 냇가로 달려갔다. 말로만 듣던 반딧불이가 있었다. 둥둥 떠다니는 빛은 마치 귀여운 요정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모두 탄성을 지르며 손바닥에 반딧불을 담으려 했다. 늦여름 잠 못 드는 밤은 그때의 황홀한 경험 때문인 것 같다.
반면 별자리 사진을 찍어 내라는 숙제 때문에 한겨울에 친구와 덜덜 떨며 밤을 샜던 기억도 있다. 별이 쏟아지는 시골의 밤공기는 너무 청명해서 폐를 정화시켜주는 것 같았다. 겨울밤도 꽤 괜찮았다. 아, 이런 식으로 기분 좋은 순간을 이어본다면 미래의 언젠가는 하루 24시간, 1년 열두 달 좋아하는 순간만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런데 아직 천둥번개 치는 것은 무섭고, 햇빛 강한 여름 한낮은 괴롭다. 비 오는 날은 우울하다. 친구는 나만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직접 그려보라고 조언했다.
어느 날, 퇴근하려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이 없어 당황하는데, 그 친구가 하얀 재킷을 번쩍 들어 영화 ‘클래식’의 조인성이 손예진의 머리를 받쳐주듯 내 머리를 가려주었다. 함께 뛰었다. “친구야. 나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네가 그려줬구나. 좋아하는 순간이 하나 더 늘었어. 고마워!” 이처럼 기분 좋은 순간에는 누군가 꼭 함께 있는 것 같다. 아니 함께했기에 더 특별한 순간이리라.
안주연 (웨스틴조선 호텔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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