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민족을 하나로 묶을 힘, 기독교서 구하다

Է:2011-05-2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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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민족을 하나로 묶을 힘, 기독교서 구하다

(12) 서천 이상재 생가와 종지교회

“나는 몇 년 전 당신이 워싱턴에 갔을 때 성경을 주어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줬지만 그대는 거절했다. 첫 번째 죄다. 또 나는 그대가 독립협회에 있을 때에도 기회를 주었건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까지 방해했다. 이런 식으로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막았으니 이것이 더욱 큰 죄이다. 나는 그대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감옥에 두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신앙을 갖게 하는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다. 그대가 지금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이전보다 더욱 큰 것이 될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꿈, 그리고 신앙

1903년 어느 날, 당시 국제개혁 음모죄로 감옥에 있던 민족운동가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은 신비스러운 꿈을 꿨다. 꿈 속 화자(話者)는 스스로를 ‘위대한 왕의 사자’라 했다. ‘더욱 큰 죄가 될 것’이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이상재의 귀청을 울리고 또 울렸다.

1887년 6월부터 1년간 미국공사관 2등서기관으로 미국에 다녀온 뒤 서양 문물, 그리고 그 밑바탕에 있던 기독교의 힘을 느끼지 못한바 아니었다. 하지만 싫었다. 기독교가. 1850년 10월 25일 충남 서천군의 가난한 선비 이희택의 맏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해 기독교에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꿈을 꾼 뒤, 그는 찬찬히 삶을 돌아봤다. 우연이었을까. 감방 벽 틈에 껴 있던 종이 한 뭉치가 눈에 띄었다. ‘이게 언제부터 저기 있었나.’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에 관한 이야기. 그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구한말 어려운 시기,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을 계속하던 그에게 마태복음은 해답지와 다름없었다. 그때까지 애써 마음에서 하나님을 밀어냈던 그는 차디찬 감방바닥에서 주님을 만났다.

2년간의 옥살이를 뒤로 하고 가장 먼저 교회를 세웠다. 함께 투옥됐던 둘째 아들 승인씨를 고향으로 보냈다. 1904년 10월 10일 종지교회의 종탑이 우뚝 섰고 첫 예배가 올려졌다. 당시 교회는 유교의 영향으로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ㄱ’자 형으로 세워졌다.

이상재의 숨결에 닿다

19일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이 선생의 생가를 향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천IC로 빠져 한산면에 다다르자 이곳저곳에서 한산의 명물 모시를 소개하는 문구가 펄럭였다. 여름이면 시원한 모시옷을 입고 파안대소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그는 늘 유머와 웃음을 보인 이상적인 크리스천이었다는 기록이 내려온다.

유동저수지 남쪽에 위치한 종지마을은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뤄져 있었다. 마을 지형이 종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종지울, 종지리라 불렸다.

그의 생가에서 종지교회는 느릿느릿 걸어도 2분이면 다다를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지금 종지교회가 있는 낮은 언덕에 그의 집이 있었고, 생가를 복원해 놓은 곳에 옛 종지교회가 있었는데 복원 과정에서 자리가 바뀌었다고 주민 한 명이 귀띔했다.

종지교회 앞마당, 즉 옛 이 선생 집이 있던 곳에 오르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인지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바람이 선선했다. 안채 대청마루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벌판을 바라보며 그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을 게다.

깔끔하게 복원된 생가

이 선생 생가는 1955년 훼손돼 유실됐다. “시골 농촌 사람들이니 역사는 그저 흘러가는 거라 생각했지. 이 선생 유적을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땐 못한 거여.”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며 안타까운 듯 혀를 끌끌 찼다.

다행히 서천군에서 72년과 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해 관리하고 있다. 90년 12월 31일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됐다. 생가 옆 유물전시관에는 이 선생이 쓴 서적 132권, 임명장 6장 등 총 244점의 유품이 보관돼 있다.

그의 생가는 중부지방의 전통적 농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황토를 이용해 벽을 만들고 초가지붕을 올리는 방식은 당시 가난한 농촌 가옥의 전형적 형태였다.

안채와 사랑채는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듯 다정한 집 분위기를 연출한다. 안채 구석 아궁이에는 그을음이 그대로였다. 그곳에서 불을 피우며 따뜻한 밥을 짓던 이 선생의 부인 강릉유씨의 손길이 묻어나는 듯했다. 사랑채 오른편 우물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자 맑은 물이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인사를 건넸다.

인생 말년 YMCA 청년회의 2대 총무, 신간회 회장 등을 지낸 그가 고향에 내려와 연설할 때마다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노인 한 명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저 한산면 있는 데까지 사람들 줄이 이어졌지”라며 검지를 펼쳐 들었다. 생가 마당에 서 그의 시선을 따랐다. 저 멀리 낮은 산이 흐릿하게 보일 뿐 시원하게 너른 벌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 선생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곳을 가득 채운 100년 전 기독교인의 기도 소리와 함성이 어렴풋이 들리는 듯했다.

서천=조국현 기자 joj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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