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부산 영도 김순덕 할머니

Է:2011-04-20 19:12
ϱ
ũ
[구술 회고록] 부산 영도 김순덕 할머니

“어망 따라 헤엄치다 열여덟부터 한몫잡이 물질했지”

부산 영도 앞바다. 그녀들이 내뿜는 숨비소리, 파도가 출렁 오리발이 첨벙, 아득한 물 밑으로 빨려서 거둬지고 마는 소리에 시간은 멈춰버린다. 1960∼70년대 제주에서 ‘물질(조업의 제주 방언)’하던 해녀들이 이곳에 와 부산 해녀가 됐다. 목돈 좀 만져보겠다고 뭍으로 섬으로 떠돌아다니다 영도 앞바다에 정착한 그녀들. 뼈마디는 저리고 숨도 잦아졌지만 ‘이여싸나 이여도싸나’ 들어가고 또 들어간다. 김순덕 할머니는 올해 예순여섯이다. 남제주가 고향인 김 할머니는 해녀 엄마 따라 헤엄치다 열여덟부터 한몫 잡이 해녀로 활동했다. 부산에 온 지는 36년째다. 18일 영도 앞바다 하늘은 맑았다. “야야 파도친다 봐라. 하아 미역이다. 미역 보래이.” 할머니는 돌미역을 한 움큼 따 올렸다.

제주 해녀

열여덟. 어릴 때부터 퐁당퐁당해서 배운 게다. 나 제주서 왔단가(왔다). 고향은 표선면. 좋다. 백사장 얼마나 좋다고. 우리 아가씨 때는 끝에서 저어까지 걸어갈라면 진짜 어마어마하고. 바다가 물이 우리 아들 목욕시키는 데 아이(아이들 목욕시킬 정도로 물이 좋았다).

(물질) 다했지. (물질로) 다 공부시키고 다했지. 옛날에는 그랬다 아이가. 아무나 못하지 그럼. 아무나 못 들가지(들어가지). 어떤 사람들은 물 요만큼 들어와도 나 죽는다 그러는데. 톳나물 캐다가. 톳나물 알제? 그니까는 호흡이 이게 깊은 데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호흡이 바빠 갖고 인제 수심 깊이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카나.

아니 뭐 촌에서어 여름에 덥거든. 더우니까 발 물에 담그면 얼마나 시원하노. 재미삼아가 아니라 옛날에는 다 그랬제.

우리 친정엄마가 서른일곱에 혼자 됐거든. 홀어머니 돼갖고. 애가 여섯. 6남매. 내가 딸로는 맏이다. 우리 오빠도 사범학교 나와서 선생질도 하고 우리 막내는 서무과장질도 하고 중학교.

우리 어망(엄마의 제주 방언) 살아계시다. 나이가 거진 구십 가까이. 제주도에 혼자. 아들네하고 안 산다. 우리 제주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게 편타코. 안즉까지는 밥 해먹으니까. 허리가 꾸부러져 가지고 그러지마는.

개론(결혼)은 우리 쩌 친척 되는 사람이 중신해서 내가 다섯(스물다섯)인가. 늦게 갔어. 아저씨는 일곱(스물일곱) 두 살 차이. 오빠 땜에. 늦게 갔지. 나 우에 오빠가 장가 안 가니까. 촌사람들이 중간에 잘 안 보내려고 하거든. 중간으로 오빠 나눴고(나두고) 딸 먼저 보낼라 안 하거든. 요즘은 짝만 나면 보내거든. 안 그래 (그때는). 그니까 촌에 저리 경북지방 울산지방 가덕도 거런데(등) 돈 벌래(벌러) 나가지고 인제 팔월 추석되면 제주 들어가거든. 제주 들어가면 인제 동생들 입을 잠바 뭐 엄마 선물 그래도 맨 막내이 동생은 젤 이쁜 걸로 젤 좋은 잠발 사주고. 탁(참) 이상하더라잉. 들어갈 땐 선물 일케 사가고. 내가 돈 쪼끔 벌며는 그 돈하고 우리 엄마 돈 번거 하고. 그렇게 살았다 아이가. 우리 오빠가 학교 교사거든. 감포 그쪽으로 발령 받아 갔고….

여 온 지는 오래됐어. 우리 아저씨 직장 따라가. 옛날 배 타고. 12시간. 쾌속선이 없어. 지금도 12시간은 걸릴 꺼라. 관광할 때 보믄 배로 가고 올 때는 비행기타고 오고 하더만.

아는 분이 부산에 나온나 나온나 해갖고 뭐꼬 그래서 부산 나왔지. 제주 서귀포 가면은 우리 인제 교육청 전부 우리 아저씨가 한거라. 대동건설에서. 대동건설인데 서귀포 교육청 우리 아저씨가 한거야. 순 학교공사. 근데 부도나니까 돈 싹 갈아먹고. 학교를 뛰면은 우리 아저씨가 목수들 이렇게 한 서른 맷 명씩 데려가고 했거든. 아니 잘사는 거보다 우린 돈이 없었어요. 근데 업자를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돈을 잘 빌려주더라고. 난중에 부도나니까 집도 팔아 불고 그래서 부산 나왔어. 그래서 방 한 칸짜리 살다가. 아이고 부산 와서 다쳤지.

남편의 사고

옥상에 태풍 부는 날 모하러 올라갔나. 옥상에서 떨어져 갖고 피가 터져갖고 비가 엉망진창 했지. 또 친구 일하는데 2층 집 지을 때는 옛날에는 우리 애들 어릴 때니까 요즘은 기계하나 딱 불러와 이삿짐도 싹싹하니 올리잖아. 그때는 사람으로 올리나 봐. 위에서 줄로 땡기고 밑에서 올리는데 발 받침대가 떨어졌는가 봐. 떨어져가 머리 한 번 크게 다쳐가. 이래 머리만 다쳐놓으니까 뇌가 파열돼 정신병원에 갔지. 정신이 나가 삐린거라(버린거라). 뭐뭐 해까닥 해까닥 하는데.

그래 (자해하려고) 막 칼 찾아다니고. 면도칼. 피를 흘리면 마귀가 없어진다 그 옛날 어른들 그 말이 있거덩. 그러니까 그거 면도칼 하나 딱 잡았는데 이눔으 딸 서이 나 아들 그 면도칼 뺄라고 팔목 잡아가 얼마나 애 먹었는지 이 방에서…. 대남병원에는 한 달에 70만원, 양산 거기는 50만원. 빵하고 우유값 별따로(별도로). 담배는 마니 못 피게 하거든. 의사들 앞에서 쭉 하나 피우고 불 딱 끄고 들여보내거든. 담배는 일주일에 한 갑. 담뱃값도 별따로.

병원살이 마 말도 못하게. 정신병원에예. 아들도 야간대 나오고 자기 벌어 가 나오고. 막내도 지들 벌어서 4년제 대학 나오고. 아버지가 애들 중학교 대닐 때부터 아예 일도 못하고 집에서 아휴 말도 못했지. 그니까 해녀도 하고 이런 아파트 빌라 집짓는 데 따라다니고 막노동하고. 어. 아휴 빼인트 하는 데 좀 따라다니고. 그래 번 돈 뭐 병원비로 다 들어가고.

난중에는 돌아가실 때는 집을 나가지고 우리 집을 못 찾았는기라. 그니까 우리 집을 못 찾아갖고 저 어디고 부산 맨 우에 삼복도로 거기 어딥니까. 수정동. 수정동 거기서 찾았다 아입니까. 그니까 8일 만에 목숨 떨어졌어요.

아이고 마 얼마나 추석에도 마마 그냥 조카들이고 뭐고 절시(전부) 아부지 찾는다고 근데 못 찾아가지고. 수정동 삼복도로에서 솔나무 밑에서 쓰러진 걸 발견해 갖고 연락 왔데. 거기 3일 있었데. 이 등산 다니는 사람들이 어떤 아저씨가 한 삼일을 딴 데 가지도 않고 뭐 정신이 없으니까. 어떻할게람. 8일 동안이나 물 한 쿰(모금)도 못 먹었는데. 아침 새벽에 등산가다 보니까 아저씨가 쓰러졌다. 그래 카 연락왔데. 얼마나 목숨이 질긴가. 얼마나 마 죽는 것이 힘들었는가. 이빨도 다 날라갔고 산에서 엎어졌다 카데. 마 뻔한 거 아입니까.

약한 믿음

돌아가신 지 3년 좀 지나갔고 추석 되면은 4년이다. 그러니까. 그때게 교회 다니길 시작하니까아. 나는 그 악몽. 무서운 꿈만 우리 아저씨 그 우짤꼬 그 꿈만. 남들은 남편이 돌아가셔도 꿈을 안 꾼다거든. 근데 나는 아 무선 꿈을 그렇게 꿨어. 우리 아저씨 땜에. 그때는 막 찬송가도 그냥 막 세게 틀어놨버리거든. 그래갖고 무서움이 도망갔고. 밤새도록 무사워 잠도 못자고. 그러니까 마 마루에도 불 화안하게 켜놓고 대문에도 켜놓고 한동안 그랬지.

교회 가니까 마음이 좋아. 마음이 편해.

인제 우리 아저씨 보고 절에 갈까 교회를 갈까. 나 이래 물었거든. 물으니까는. 나는 그때는 마음이 헷갈려갖고. 정신병자가 돼 놓으니까. 마음 달래야 거든. 절에 갑시다 해봤다가 교회 갑시다 해봤다가. 우리 아저씨 땜에 교회 한 8개월 둘이가 한 8개월 댕기다가. 인제 나 안 벌면 안 되거든 우리 아저씨 뱅원비 땜에. 가까운 아파트 (일)할 때는 교회 심방도 따라다니고 했는데 가까운 데 일자리가 없고 멀리 나가니까 교회를 못 다니는 기라. 나 안 가도 살짝 가면 안 되니. 안 가더라고.

우리 큰딸은 학교 다닐 때부터 혼자 (교회에) 다녔어. 반대 안 했지. 아빠도 절대 반대 안 했어.

근데 우리 큰딸이 누가 뭐해도 절대 시집을 안 갈라고 했거든. 근데 딱 교인이 나타나니까 가는 거 있지. 같은 교회. 딸. 아홉(스물아홉)에 보냈다. 딸보고 뭐라 했지 와 시집 안 가냐고. 딱 교인 나타나니까 가더라니까. 믿음. 응 믿음 보고. 누가 선 들어오면 “나 애인있어요?” 딱 거짓말하고 안 만나고 하더니. 작은시엄마도 좋아하고 우리 조카며느리 교회 다닌다고 막 좋아하고.

안수집사 안수집사야. 애들도 다 가르치고. 저기 어른들보담은 애들은 일찍 예배 온다 아이가. 교사거든. 항상 아침에는 일찍 가. 아프다가도 빨딱 일어나 간다 아이가.

그래도 다녀뵈까(다녀보니) 전부 다 사우도 교인, 매느리감도 교인, 손자매느리감도 쩌 교회 다녀. 다녀보니까 그러더라고. 사돈만 해도 얼매 많다고. 내가 가보니까 그렇더라고. 그러니까 내 딸 다니는 교회 가지 어디 갈꾸나.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데 다니는데.

아니 그니까는 같이 가잔 말은 잘 안 하거든. 안 해는데. 내가 서서히 마음이 풀리더라고. 저절로 인저 마음이 풀리고. 그니까 우리 아들도 나 이런 거 교회 다닐 때. 아들보고 “교회 가볼래?” 절대 강조 억지로 안 하거든. 교회 가볼래? 우리 아들보고 그랬지. 낭중에 안 간다면 절대 안 해. 아들도 교회 댕개예. 저 스스로 자기 스스로 다아 풀려. 우리 저 둘째딸도 자기 스스로 그자마 동삼동 교회 가고.

나는 새벽기도 한 번 가봤어. 그러니께 내가 아직 믿음이 약한거지 응. 한 3년밖에 안 됐으니까.

마지막 영도 해녀

영도 여게. 우리보담 나이 좀 든 사람도 있고. 바다 안 봤지예. 그거 입고 저어 걸어 가봐라. 납덩어리. 얼마나 무거운 가. 우리대 넘으면 해녀 없어. 마지막이야.

지금 우리 제일 나이 어린아가 오십육. 그 밑엔 없어. 잠수해 잘 버는 사람은 참 잘 벌어. (제주) 우도 같은 경우는 배에서 퐁당 빠져갔고 작업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여든 넘어도 하고. 우리 같은 경우는 걸음을 많이 걷는 거라. 억수로 다리도 아프고 힘들고오. 이 우리 같은 때는 무건 거 지고 멀리 못 간다 아입니까. 그자?

저 게도 우리하고 작업은 안 해도. 그런 분도 작업해 팔십여섯. 그 할머니가 돈이 많아도 가만있는 성질 아니거든 그러니까 인자 운동한다고. 그 할머닌 잠수병 없어. 근데 숨이 차지 나이가 드니까. 저 파도치는 거 봐바.

난 바다하고는 탈이 많아. 자꾸 아파. 귀도 아프고 염증이 있어. 나는 이거 잠수병이거든. 감기도 자주 걸리. 버는 사람은 마니 벌고 나는 키만 컸지 숨이 차 호흡이 바쁘고. 어떤 사람들은 할튼 십 미터까지는 들어갈 거라. 잘하는 사람들. 저어 들어간 이들 해삼이나 혹시나 있을까 싶어서.

산소토옹. 여기 하면은 그거 불법이야. 바다 씨앗 다 조져 불라고.

아침에 한 9시에 작업 들어가며는(가면은) 한 3시 돼야 나는(나오는) 사람도 있고 2시 돼야 나는 사람도 있고. 짬(겨를)이 없어. 나는 시장 갈라며는 한 시쯤에 나오고. (일하고 먹는 밥맛은) 꿀맛인데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라 바빠바빠 마음이 바빠.

물이 어질러서, 공사 땜에 작업이 잘 안돼. 구정물이 저 온 데 다 퍼져갔고 막 이래. 옛날에는 이래 안 그랬거든. 작년만 해도 여 물건 많이 잡아넣었거든.

소원

우리 딸 손잡고 왔으니까는. (영도 온 지) 한 삼십년 됐나.

자 마 우리 집에 없는 집에 마 며느리 감 사귀고 있는데 마. 잘됐으면 그거 바랄 기밖에 없어.

또 모 그렇지 사우도 사업하는 사람도 잘돼야 되겠고. 부속품. 저거 채린 지(차린 지)가 한 2년 백에 안 됐거든. 이거 재개발 빨리 들어서면 내가 아파트 하나 작은 거 해볼 건데. 그자.

■ 연보

1946년 제주 표선면 표선리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남

1971년 제주 서귀포 현경남(당시 27세)씨와 혼인

1972년 장녀 윤재 출생

1973년 차녀 윤희 출생

1975년 3녀 윤미 출생, 부산 이사

1979년 장남 철영 출생

2008년 영선침례교회 출석

2009년 침례

■ 영선침례교회는

1957년 부산 영도구 영선동 2가에 부산 침례병원(현 부산 남산동) 조이전 전도사가 중심이 돼 창립된 교회다. 영도 앞바다 인근에서는 역사 교회로 꼽힌다. 4년 전 경북 영주에서 조갑문(57) 목사가 부임해 담임목사직을 맡고 있다. 영선동 일대엔 다수 교회가 밀집해 있으나 샤머니즘이 뿌리 깊이 박혀 있어 복음화율이 낮다. 영선침례교회는 최근 필리핀 말라이 발라위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다. 제적 성도 수는 220여명, 출석 성도 수는 120여명이다(051-418-0878).

부산=글 이경선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Ŭ! ̳?

Ϻ  Ŀ
Ϻ IJ о
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