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과 허위·광기의 시대, 詩가 있어 버텼다… 김규동 ‘나는 시인이다’
폐렴과 노환으로 와병 중인 원로 시인 김규동(86)씨가 펴낸 ‘나는 시인이다’(바이북스)는 기력이 딸린 나머지 출판사 측이 제안한 구술 정리로 탈고한 회고록 형식의 에세이집이다.
유소년 시절의 초상에서부터 일제 치하에서의 학업, 은사 김기림 시인과의 만남, 한국시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김수영 오장환 한하운 천상병 박거영 등과 어울렸던 일화 등은 그가 아니면 얻어듣기 어려운 에피소드다. 1925년 함북 종성 출신인 그는 경성고보 2학년 때 부임해 온 영어 교사이자 시인인 김기림을 만났다. “수업 중에는 손수건을 꺼내서 꼭 안경을 한번씩 닦아요. 티가 하나도 없이 해서 써요. ‘아차 가만있어 봐, 이건 아닌 것 같다.’ 교단에서 내려와 앞에 앉은 아이 사전을 찾아봐요. ‘아까 내가 계제라고 했는데 이 계제는 시간으로 고쳐야겠다.’ 이 정도로 단어에 자신 있고 정확했어요.”(98쪽)
그는 경성고보 동급생 가운데 영화감독 신상옥, 시인 이용악(1914∼1971)의 동생 이용해, 사회당 당수를 지낸 김철(소설가 김한길의 부친)과 절친이었다. 신상옥은 청진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바람에 거의 매일 지각을 했으나 학교가 끝나면 득달같이 영화관으로 달려가던 모습은 그의 눈에서 되살아난다.
“시인 이용악의 아우 이용해도 동급생이었어요. 나는 영어를 잘 못하는데 그 친구는 영어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어요. 영어에 능통했지요. 김기림 선생이 아주 사랑했죠. 영어사전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단어를 외웠어요. 도시락을 먹을 때도 단어를 찾아가며 밥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였어요.”(109쪽)
이용해는 형에게 늘 삐딱한 감정이 있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돈이 좀 생기면 몽땅 챙겨 서울에 가서 술추렴이나 하고 돌아오는 형을 가산을 탕진했다며 원망하던 이용해는 해방 직후 장티푸스로 숨을 거둔다. 서른 살에 요절한 박인환의 모습은 더욱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해방 이듬해 일본학자들이 버린 책들을 모아 서울 낙원동 초입에 ‘마리서사’라는 문학예술서점을 낸 박인환은 정작 책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책을 팔기는커녕 술친구들만 들끓는 바람에 2년도 안돼 문을 닫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이 5·16 군부 쿠데타 이후 심한 강박증을 앓았다는 사실은 김규동의 증언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다. 5·16 직후 두 사람은 남산에서 명동으로 가기 위해 퇴계로의 육교를 건너야 했다. “손으로 내 가슴을 탁 치면서 멈춰 서라는 거예요. ‘이게 무너지지 않을까? 우리를 죽이려고 만들어놓은 거 아냐?’ 깜짝 놀랐어요. 육교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거예요. 물론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반전하고자 시도하는 블랙 유머였다고 봐야죠.”(247쪽)
이가 빠져 30대부터 틀니를 하는 바람에 오징어를 먹을 수 없었던 사람, 생계를 위해 양계를 해야만 했던 사람, 여성과 사귀는 것에 소질이 없었던 사람, 항상 긴장하고 불안해하던 사람이 김수영이었다. 김규동은 “혼돈과 무질서, 허위와 광기의 시대를 용케도 시라는 무기가 있어 그나마 오늘에 이르렀다”며 “소원이 있다면 세상 떠나기 전 꿈속에서처럼 고향 땅 함경북도 종성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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