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찬영 (3) 공산당 들끓는 중국 떠나 해방된 조국으로
사경회를 인도하러 오신 분은 이성봉 목사님이셨다. 한겨울이라 눈이 많이 내렸고 매서운 칼바람까지 몰아쳤다. 그렇지만 이 목사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새벽 4시30분 집회에 참석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3년간이나 훈련시켰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계집종 앞에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데 성령의 뜨거운 바람이 내 가슴을 후려쳤다. 순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뜨거운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체험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진다. 이 목사님의 설교는 권위와 영력이 배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우리가 기도하며 기다리던 해방이 되었으니 이제는 서울로 가야 한다. 여보,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알아보고 올 테니 그때까지 아이들하고 기다리시오.”
아버지는 간단하게 짐을 챙겨 떠나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셨다. 지병인 위장병이 도져 서울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길로 몸져누우셨다. 그리고 두 주일 후 어머니의 지극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 마흔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와 맏아들인 나, 누이 하나, 어린 동생 둘. 다섯 식구는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여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는 네 남매를 돌보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셨다. 그리고 두어 달 뒤 나에게 서울까지 갈 차비를 마련해주셨다.
“찬영아, 너도 알겠지만 공산당이 들끓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대로 해방된 조국의 서울에 가야만 내 나라 내 땅에서 마음껏 예수님을 믿으며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구나. 네가 아버지 대신 서울에 다녀오도록 하여라.”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뒤로 하고 나는 생전에 아버지가 그렇게 가보기 원하셨던 서울로 떠났다. 친구 최원일과 함께 서울로 떠났다. 1946년 1월 소련군 트럭을 얻어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계속 내려왔다.
하루는 성진이라는 곳에 이르러 조그마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됐다.
“동무들, 어디메서 오는 것이오? 그 보따리 좀 열어보시오.”
어디선가 신고를 받고 달려온 보안대원이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일어난 신의주학생사건 때문에 폭동을 일으킨 학생들을 잡기 위해 젊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수색하고 있었다. 짐을 샅샅이 뒤졌다. 낡은 성경책과 영어책이 나왔다. 보안대원이 투박한 함경도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동무, 영어 좋아하우?”
“일제 강점기에는 영어가 적국의 말이라 배우지 못했는데 이제는 외국어를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 갖고 왔습니다.”
“동무들은 신의주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우?”
“아닙니다. 저희는 중국에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보안대원들은 우리가 신의주에서 도망온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 풀어주었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줄 사람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도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해 왔다. 오징어 장사를 하는 등 녹록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놀라웠다. 간도사범학교 동기동창인 현용무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Ŭ! ̳?
Ϻ IJ о
õ